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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폭도대토벌작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793
한자 南韓暴徒大討伐作戰
이칭/별칭 남한대토벌작전,호남의병대학살사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일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9년 9월연표보기 - 남한폭도대토벌작전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09년 10월연표보기 - 남한폭도대토벌작전 종결
발생|시작 장소 어등산 - 광주광역시 광산구 서봉동 지도보기

[정의]

1909년 9월부터 10월 사이에 전라도와 광주 지역에서 일제가 항일 의병들을 궤멸시키고자 벌인 대규모 군사 작전.

[역사적 배경]

일제는 전국 각지의 의병 활동을 궤멸시키기 위해 대규모 군사 작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호남 지역에서는 1908년 들어 의병 항쟁이 더욱 확산되었다. 호남 지역은 의병들의 교묘한 전술과 출신 지역을 중심으로 대중적인 지지 기반이 확고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에 대한 배척 의식이 강하여 의병에게는 동정적이지만 일본군에게는 편의를 제공하려 하지 않아서 다른 지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전이 쉽지 않았다고 일제도 인정할 정도였다. 호남 지역에서의 의병 항쟁의 격화와 민중의 저항은 일제의 조선 경제 침략과 식민지화 정책을 추진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일제는 이에 대한 해결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여 폭력적인 방식으로 의병 활동을 궤멸시키고자 하였다.

[경과]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25일에 걸쳐 이뤄졌다. 원래는 9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 총 3기로 나눠 실시할 계획이었으나 성과가 없자 10월 25일까지 연장하였다. 일제는 2000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3단계에 걸친 작전을 진행하면서 호남의병을 궤멸시켜 나갔다.

제1단계 작전은 전라남도 남원을 기점으로 하여 고흥, 광주, 영광으로 연결되는 지역이었다. 제2단계는 고흥, 광주, 영광 근방을 기점으로 해서 남서해안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제3단계는 도서 지방으로 탈출한 의병을 궤멸하고자 무인도 지역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집중적이고 반복적인 대규모 초토화 작전이었다. 일제는 이를 위해 먼저 촌락을 포위하고 경계병을 배치한 다음, 면장이나 동장을 대동하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미리 정리해 둔 20~60세 남자의 명부 혹은 민적 등에 기록된 남자를 일일이 대조해 가면서 의심이 가는 사람은 곧장 체포하여 심문하였다.

폭도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의병과 일반 주민들을 구별하지 않고 체포하거나 구타, 고문, 살해하는 만행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또한, 이미 수색하였던 마을을 다시 불시에 수색하여 토벌대를 피해 숨어 있다가 다시 나타나는 의병까지를 수색, 조사하여 체포하고 처형하였다. 특히 의병과 관계가 깊은 마을의 경우에는 수십 번이나 수색을 거듭하였다.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의병 활동은 어등산 인근과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일대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08년 4월 김태원 의병장과 의병 23명이 일본군과 교전하다 순국하였으며, 1909년 1월에는 조경환 의병장과 의병 20명이 어등산 자락 운수동에서 전사하였다. 또 1909년 9월에는 양동환 의병장과 의병 80명이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가 의병 10명이 순국하였다. 그리고 전해산 의병부대의 중군장을 맡았던 김원범 등도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결과]

당시 전라남도경찰서가 보고한 1909년 8월 25일부터 10월 21일까지의 작전 결과에 따르면 사망 420명, 체포 837명, 자수 850명, 노획한 총기 450정, 노획한 도창(刀槍) 51자루이다. 체포한 의병대장으로 심남일, 안계홍, 황두일, 박사화, 나성화, 박영근, 강무경, 손덕오, 양진여, 권택, 모천년 등 26명이다. 살륙한 의병대장으로는 임창모, 임홍규, 송삼봉, 임삼봉 등 수십 명이라고 보고하였다.

조선임시파견대사령부(朝鮮臨時派遣隊司令部)의 보고에는 1909년 9월 1일부터 1909년 10월 30일까지 작전으로 사망한 의병장 23명, 체포 61명, 자수 19명이며 이들 의병장의 총병력 규모는 4138명으로 기록되었다. 주요 의병장 가운데 양진여는 대토벌 실시 직전인 1909년 8월 26일 체포되었고, 안규홍은 9월 25일, 심남일은 10월 8일에 각각 체포되었다. 임창모, 임학규 부자는 10월 12일 보성군 복내장 부근의 흑석에서 토벌대와 교전하다 전사하였다. 12월 17일에는 이미 부대를 해산하고 잠복해 있던 전해산이 밀정의 밀고로 영산포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렇게 호남 지역 의병장들이 체포되거나 살해됨으로써 호남 지역의 의병운동 조직은 급속히 해체되었다.

일제는 토벌 작전의 후속 조치로 귀순하거나 체포한 의병 중 일부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고 이들을 도로 공사에 강제 동원하였다. 전라남도 강진, 장흥, 보성, 순천, 광양을 경유하여 경상남도 하동에 이르는 총 연장 약 410리[약 161㎞]에 이르는 도로 공사에 500여 명이 동원되었다. 도로 공사는 군사적인 필요성 및 반대 세력에 대한 위무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는데, 호남의병의 재기를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남한대토벌작전 이후 전라도와 광주 지역에서는 지역사회의 신망 있는 지도자들을 많이 잃은 반면, 일본인과 일본인의 상업 활동은 증가하였으며 일제의 통치력 또한 급속히 확산되었다.

[의의와 평가]

일제가 항일운동세력에 대해 행한 최대 규모의 군사 작전이었다. 호남의병에 대한 일제의 군사 작전에는 대대적인 군병력이 동원되었으며 헌병과 경찰도 참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면장, 이장 등 지방 행정의 말단까지 총동원되었다. 일제의 대규모 군사 작전으로 호남 지역의 의병 세력은 거의 궤멸되었다. 이후 의병 세력은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중국 만주, 러시아 등 국외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일제가 지칭한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은 일제 스스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쾌거로서 그 규모가 엄청나서 마치 대전쟁"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호남의병을 대상으로 한 가장 방대하고 무자비한 군사 작전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를 1909년 '호남의병대학살사건'이라고 바꾸어 부르자는 견해가 국내에서 제기되기도 했다. 또한, 호남의병의 치열한 격전지였던 어등산에는 한말 호남의병이 활동하였던 전적지에 대한 탐방로 안내와 김태원 의병장 등이 의병 활동을 하면서 머물렀던 토굴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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