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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194
한자 梁振汝
영어공식명칭 Yang Jinyeo
이칭/별칭 서암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효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2년 5월 11일연표보기 - 양진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8년 7월 20일 - 양진여 광주 삼각산 죽청봉에서 거병, 의병장으로 추대
활동 시기/일시 1908년 10월 26일 - 양진여 신촌리 전투 참전
활동 시기/일시 1908년 11월 - 양진여 대치·추월산 전투 참전
활동 시기/일시 1909년 2월 - 양진여 연합 의병진에서 총대장으로 추대
활동 시기/일시 1909년 8월 26일 - 양진여 부왜인의 밀고로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09년 12월 13일 - 양진여 광주지방법원 교수형 선고, 대구공소원에 항소
활동 시기/일시 1910년 3월 3일 - 양진여 내란죄로 교수형 최종 판결
몰년 시기/일시 1910년 5월 30일연표보기 - 양진여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양진여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2년 10월 - 양진여의 호를 따서 도로명 서암대로 명명
출생지 전라도 광주목 서양면 니동리
활동지 신촌리 - 전라남도 광주군 송정읍 신촌리
활동지 대치 -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월성리
활동지 추월산 - 전라남도 담양군|전라남도 순창군
묘소 광주광역시 서구 매월동 산 151-9 지도보기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연합 의병진 총대장

[정의]

대한제국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 출신의 항일 의병.

[개설]

양진여(梁振汝)[1862~1910] 1862년(철종 13) 5월 11일 전라도 광주목 서양면 니동리[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벽진동]에서 양남중(梁南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濟州)이며, 호는 서암(瑞菴)이다. 47세 때 전라남도 광주 지역 삼각산에서 거병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전라남도 광주·장성·담양·창평 등지를 주요 활동 무대로 항일 투쟁을 벌였다.

[가계]

양진여는 아내 박순덕(朴順德)과의 사이에서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양상기(梁相基)는 의병을 이끌며 일본군과 싸우다 체포되어 순국하였으며, 양진여의 이복동생 양동골(梁東骨)양진여 의병진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어 3년 유배형을 받았다.

[활동 사항]

평민 신분이었던 양진여는 어린 시절 전라남도 장성군 불태산에 있는 정이암(鄭李庵)에서 수학하였다. 대한제국 말기 국운이 기울자 전라남도 담양군 삼인산 뒤쪽에 풍정암(風征庵)을 세우고 제자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 또한, 주막업을 하며 시국을 인식하고 정보를 수합하며 거병 의지를 세웠다.

1908년 7월 20일 삼각산 죽청봉(竹靑峰)[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에서 친일 관료와 일인 관리를 물리치고 조선을 독립시키기 위해 거병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박성일(朴聖一)·김익오(金益五)로부터 군자금과 군량을 징발하여 군수를 조달하였으며, 의병 확충에 진력한 결과 1908년 11월에는 100여 명으로 부대의 규모가 커졌다. 양진여 의병진의 주요 활동 무대는 전라남도 광주, 장성, 담양, 창평 등이었다. 양진여 의병진은 일본인 우편 체송인(遞送人) 에토[衛藤]를 처벌하는 등 일본 관료를 응징하였다.

1908년 10월 23일 양진여는 단독으로 담양에서 일본군 기병 2명을 기습 공격하였다. 사흘 뒤 10월 26일에는 전라남도 광주군 송정읍 신촌리에서 나까코지[中小路] 군조(軍曹)[하사관 계급]가 인솔하는 일본군을 치열한 교전 끝에 물리쳤다. 같은 해 11월 담양 일대의 대치·추월산 전투에서도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다가 추월산에서 야마다[山田]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15명의 의병이 전사하는 등 피해를 입은 뒤 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다.

1909년 2월 연합 의병진이 구성되어 양진여가 총대장에 추대되었으나, 지병과 부상으로 부대 전면에 서서 진두 지휘를 할 수 없었다. 양진여는 일본군의 남한대토벌 작전 때 총상을 입고 전라남도 장성군 갑향면 향정리에 은둔하며 부상을 치료하던 중 같은 해 8월 26일 부왜인(附倭人)[일본에 붙어서 나라를 해롭게 하는 사람]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1909년 12월 13일 양진여는 광주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대구공소원에 항소하였으나, 1910년 3월 3일 내란죄로 교수형을 최종 판결받고 5월 30일 순국하였다.

[묘소]

양진여는 아들 양상기와 함께 광주광역시 서구 매월동 산 151-9 백마산 기슭에 안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92년 10월 광주광역시에서는 양진여를 기리기 위해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 동운고가 북단 교차로와 풍향동 서방사거리를 잇는 도로 이름을 양진여의 호를 따서 '서암대로'로 지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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