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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410
한자 金泰元
영어공식명칭 Kim Taewon
이칭/별칭 김준,김태중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노기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0년 9월 16일연표보기 - 김태원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김태원 호남창의회맹소 선봉장으로 전라남도 고창·법성포·함평·담양·장성·광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
활동 시기/일시 1908년 2월 - 김태원 무동촌 전투에서 일본군 광주수비대장 요시다 카츠히로 소좌와 일본군 수 명 사살
활동 시기/일시 1908년 3월 - 김태원 토천 전투에서 일본군 테츠도 산다 등을 포함한 수십 명 사살
활동 시기/일시 1908년 4월 24일 - 김태원 휘하 의병 20여 명과 전라남도 광산군 어등산 자락에서 유진
몰년 시기/일시 1908년 4월 25일연표보기 - 김태원 일본군과 교전 중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김태원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2003년 - 국가보훈청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출생지 전라도 나주목
활동지 무동촌 -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현
활동지 토천 - 전라남도 장성군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호남창의회맹소 선봉장

[정의]

개항기 전라남도 및 광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개설]

김태원(金泰元)[1870~1908]은 1870년(고종 7) 9월 16일 전라도 나주목[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문평면 북동리] 갈마지(渴馬池)마을에서 아버지 김로학(金魯學)과 어머니 장수황씨(長水黃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생 김율(金聿)도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어려서부터 지략(智略)이 웅대하였으며, 순릉참봉(順陵參奉)의 벼슬을 하던 중 의병에 참여하였다.

1908년 1월 1일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현 무동촌(茂洞村) 전투에서 일본군 광주수비대장 요시다 카츠히로[吉田勝三郞] 소좌와 부하 수 명을 사살하였다. 일제는 김태원을 잡기 위해 특설부대를 조직하여 김태원이 유진(留陣)하고 있던 전라남도 광산군 어등산을 포위하였고, 김태원 의병장과 20여 명의 의병은 일본군과 교전 중 전사하였다.

[활동 사항]

1907년 9월 기삼연(奇參衍)은 전라남도 장성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김태원은 이 말을 듣고 김용구(金容球), 이석용(李錫庸), 전해산(全海山), 심남일(沈南一) 등이 연합하여 결성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합세하여 선봉장이 되었다. 선봉장이 되어 고창, 무장, 법성포, 함평, 담양, 장성, 광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김태원은 전세를 확장할 목적으로 기삼연과 분진하여 활동할 것을 결의하였다.

1908년 1월 24일부터 15개 부대를 동원하여 대규모 군사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태원은 일본군 광주수비대장 요시다 카츠히로 소좌의 대규모 군사 작전에 쫓기게 되었다. 1908년 2월 2일 설날, 군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현의 지곡(芝谷)을 거쳐 무동촌에 유진하였다.

무동촌은 무등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계곡과 높은 산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다. 동쪽으로는 인암마을 기린 바위에서 강태굴을 지나 5리[약 2㎞] 가까이 계곡으로 이어져 유격 전술을 구사하기 좋은 천연 요새이다. 남쪽으로는 화순군 이서면 송계와 상촌으로 연결되어 시무지기폭포와 귀봉암으로 통한다. 북쪽으로는 백남정재, 중고개, 무적굴, 북산, 사봉리, 신선대, 금곡마을로 이어진다. 서쪽으로는 망월봉으로 이서면 월정으로 적벽으로 향하는 통로이다.

일본군 요시다 카츠히로 소좌가 선두에서 군도를 휘두르며 말을 타고 진격하자 돌담에 매복 중인 의병들이 신호에 맞추어 천보총(千步銃)을 발사하여 사살하였다. 일본군은 크게 동요하여 송계 방향으로 퇴각하자 김태원 의병장의 동생 김율 의병부대가 재차 공격하여 요시다 카츠히로 소좌의 부하 수 명을 사살하였다.

김태원은 기삼연 의병장이 전라남도 순창군에서 붙잡혀 광주군으로 이송되어 총살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부대를 '호남의소(湖南義所)'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무장 투쟁을 강화하였다. 이후 전라남도 장성군 토천(土泉) 전투에서 일본군 테츠도 산다[鐵道三田] 등을 포함한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일제는 김태원의 의병부대를 탄압하기 위해 1908년 3월 제2특설순사대를 편성하였다. 4월 19일에는 광주수비대를 중심으로 8개 종대를 편성해서 15일간의 군사작전을 실시하였다. 그러던 중 김태원의 동생 김율이 전라남도 화순군 송정리 소지방(所旨坊)에서 붙잡혀 광주감옥에 구금되었고, 이어 김태원의 전령사 이문경(李文景)이 전라남도 함평군 평능면에서 체포되었다. 4월 24일 김태원은 숙박지인 전라남도 광주군 소고룡면 두동리에 있는 민영두(閔永斗)의 집에서 탈출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곳에서 김태원의 비서 김규철(金圭哲)을 체포하였다. 심문 과정에서 김태원이 전라남도 광산군 어등산 자락에 유진 중인 것을 알아내고 포위하였다.

어등산 마당바위 인근의 토굴과 석굴에서 부하 김해도(金海道) 등 23명과 유진하고 있던 김태원은 은색 두루마기에 흰색 비단 저고리를 착용하고 쌍안경 1개, 조선도 1개, 나침반 1개, 화약통 1개, 서류 등을 소지하고 있었다. 1908년 4월 25일 38세의 김태원 의병장과 부하 의병들은 끝까지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전라남도 경무과에서 발행한 『전남폭도사』 에서 일제는 김태원·김율 형제 의병장을 거괴(巨魁)라고 하며 두려운 의병장으로 기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국가보훈처에서는 2003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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