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룡동 신흥마을 당산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321
한자 五龍洞新興-堂山祭
이칭/별칭 오룡동 신흥마을 동제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제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오룡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수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중단 시기/일시 1993년 이후 - 오룡동 신흥마을 당산제 중단
의례 장소 할머니당산 - 광주광역시 북구 오룡동 신흥마을 안 옹기가마 옆지도보기
성격 마을 공동 제사
의례 시기/일시 정월 열나흗날
신당/신체 할머니당산[느티나무에서 입석으로 변화]

[정의]

광주광역시 북구 오룡동 신흥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정월 열나흗날에 모셨던 마을 공동 제사.

[개설]

오룡동 신흥마을 당산제는 정월 열나흗날 밤에 마을의 수호신인 할머니당산에게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지내던 마을 제의이다. 당산제가 잠시 중단되었다가 다시 재개되면서부터 부녀회에서 주도하여 당산제를 모시면서,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여느 마을의 당산제와는 다른 특성을 보였다. 이후 광주첨단과학산업단지 조성으로 마을이 철거되면서 1993년 당산제를 마지막으로 모셨다.

[연원 및 변천]

신흥마을은 신점, 새점으로 불리어 왔는데 1984년 주민들이 결의하여 '신흥'으로 개칭하였다. 신흥마을은 효덕동 원제마을, 광산구 평동출장소지로촌 과 함께 광주광역시의 대표적인 옹기마을로, 그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성업하였던 마을이었다. 1992년부터 광주첨단과학산업단지가 조성될 당시까지 3개의 옹기점에 4개의 옹기가마가 남아 있었다. 당산제를 언제부터 지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50~60년 전에 2~3년간 제를 지내지 않은 시기가 있었다. 이때 마을 남자들이 여러 명 사망하자 당산제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여 마을부녀회에서 다시 당산제를 모시도록 추진하였다. 이때부터 당산제를 올릴 때 제관은 남자가 맡으나 모든 추진은 부녀회에서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광주첨단과학산업단지 조성으로 마을이 철거되면서 1993년 당산제를 마지막으로 모시고 중단되었다.

[신당/신체의 형태]

신흥마을에서는 6.25전쟁 전까지는 마을 안 옹기가마 옆에 있는 느티나무를 할머니당산으로 모셨으나, 외지 사람인 천주교 신자가 땅을 구입하면서 당산나무를 베어버렸다. 그 이후 신체를 입석으로 바꿔 모셨는데, 높이 165㎝에 둘레 160㎝의 화강암으로 위쪽은 좁고 아래쪽이 넓은 형태이다. 현재 입석은 마을이 폐촌됨에 따라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광주역사민속박물관에서 기증 받아 야외 전시장에 이설 복원하였다.

[절차]

오룡동 신흥마을 당산제는 정월 10일 무렵에 마을회의를 열어 제관 1명, 축관 1명, 화주 1명을 선정한다. 보통 생기복덕(生氣福德)[생기법으로 본 길일과 사람이 태어난 생년월일의 간지를 팔괘로 나누어 가린, 길한 일진의 날]이 맞고 궂은 일을 당하지 않은 마을 어른으로 선정한다. 제비(祭費)는 마을 사람들이 각자 형편껏 낸 것으로 충당하였으나, 1990년대에는 마당밟이를 해 주고 걷은 성금과 마을 구판장을 세 놓고 받은 돈으로 비용을 사용하였다. 정월 12~13일 무렵 양동시장에 가서 제물(祭物)을 구입해 오고, 화주집에서 백시루떡, 돼지머리, 북어, 명태탕, 삼실과, 나물, 술 등을 준비한다.

당산제인 열나흗날이 되면 당산 입구와 제관들 집 앞에 금줄을 치고 금토를 뿌린다. 자정 무렵이 되면 꽹과리, 징, 소고, 북, 장고 등으로 구성된 농악대가 굿을 준비하면서 제의 시작을 알린다. 한복 차림의 제관과 마을 사람 중 부정타지 않은 사람들이 화주집에 모여 준비된 제물과 제구를 하나씩 손에 들고 농악대를 앞세워 당산으로 향한다. 입석으로 된 할머니당산에 당도하면 '진설→분향→강신→독축→소지→음복→헌식' 순으로 제의가 진행된다. 신흥마을의 당산제에서는 대대로 내려오던 축문이 망실되어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비는 내용으로 책에서 옮겨 적어 사용하였으며, 헌식은 상에 차려진 음식을 조금씩 떼어 당산 주위에 뿌린다. 제가 끝나면 당산 앞에서 굿을 쳐 마을 사람들에게 끝났음을 알리고, 제에 사용되었던 향과 초를 그대로 둔 채 마을로 돌아와 공동샘을 돌면서 굿을 침으로써 모든 행사는 끝난다.

당산제를 부녀회에서 추진하면서부터는 여자들도 배례와 헌작 등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농악대의 상쇠도 여성이 맡는 등 여느 마을 당산제와 달리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추진하는 당산제이기도 하였고, 옹기를 굽는 마을의 특성을 반영하여 풍년과 함께 옹기그릇이 잘 구어지게 해 달라고 기원하는 것이 신흥 당산제의 특징이었다.

[부대 행사]

당산제가 끝나면 정월대보름날부터 각 집을 돌며 마당밟이를 한다. 이때 걷은 돈으로 다음 해 당산제 비용을 충당하기도 하였다.

[현황]

오룡동 신흥마을 당산제광주첨단과학산업단지 조성으로 마을이 철거되면서 1993년 당산제를 마지막으로 모시고 중단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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