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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106
한자 金好善
영어공식명칭 Kim Hoseo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병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1년 3월 23일연표보기 - 김호선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8년 - 김호선 광주공립보통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31년 10월 - 김호선 광주노동조합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31년 11월 - 김호선 최창진과 공동으로 광주노동조합 기관지 『노동자신문』 창간
활동 시기/일시 1931년 12월 19일 - 김호선 전남노농협의회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32년 2월 - 김호선 3.1운동 기념일에 사용할 격문 배포 준비 중에 일제 경찰에게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34년 11월 - 김호선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 형 선고받음
활동 시기/일시 1982년연표보기 - 김호선 건국포장 수상
활동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김호선 건국훈장 애국장 수상
몰년 시기/일시 2001년 8월 5일연표보기 - 김호선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8년 9월 - 김호선 형 김덕선 처형 목격
출생지 광주광역시 북구 누문동 125번지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광주서석초등학교 - 광주광역시 동구 제봉로82번길 26[서석동 14-1]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전남노농협의회 총책임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호선(金好善)[1911~2001]은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읍 누문정 125번지[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누문동]에서 태어났다. 『노동자신문』을 창간하고 인쇄·배포하여 항일 의식과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였다. 또한, 1931년 에는 전남노농협의회(全南勞農協議會)를 조직하였다. 1932년 2월 3.1운동 기념일에 사용할 격문을 제작하여 배포를 준비하던 중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김호선은 17세인 1928년 광주공립보통학교[지금의 광주서석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광주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신간회 광주지회의 부회장 정수태(丁洙泰)의 집에 고용되어 살면서 감화를 받았고, 1928년 9월에는 친형인 김덕선(金德善)이 제4차 공산당 사건으로 경성에서 검거되어 처형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1930년 5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신문 배달 등을 하면서 머무는 동안 조선인들과 만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였다. 1930년 10월에 귀국하여 얼음 가게, 야채상 등을 전전하다가 1931년 9월 이우적(李友狄), 송회갑(宋晦甲) 등과 교류하였다. 1931년 10월 하순에 이우적의 지도 아래 송회갑 등과 함께 광주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정미(精米)·철공·운수 노동자 분야를 담당하여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이들의 의식 확산을 위한 교양 사업에 노력하였다.

1931년 11월 최창진(崔昌鎭)과 공동으로 광주노동조합의 기관지로서 『노동자신문』을 창간하였다. 1931년 11월 20일경 창간호, 1931년 12월 중순경 제2호, 1932년 1월 1일경에 특별호 수십 부를 등사판으로 인쇄하고 배포하여 항일 의식과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였다.

1931년 12월 19일에는 이우적, 송회갑, 김기선(金琪善), 김영재(金永才), 김백동(金百東), 윤승현(尹昇鉉), 정시환(鄭時煥), 김준수(金俊琇) 등 9인과 비밀 결사체인 전남노농협의회를 조직하였다. 전남노농협의회는 조직부 산하에 노동부·농민부·반제부(反帝部)와 정치부 산하에 재정부·출판부·교육부·조사부의 부서를 갖추었는데, 김호선은 총책임 겸 조직부를 맡아 활동을 주도하였다.

1932년 2월 전남노농협의회의 기관지인 『전남노동자신문』 150부를 뿌리고, 다시 『학생뉴스』 30부와 3.1운동 기념일에 사용할 격문 약 150매를 제작하여 배포를 준비하던 중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 1934년 11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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