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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719
한자 三一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효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1일연표보기 - 3.1운동 발발
발단 시기/일시 1919년 2월 - 정광호가 귀국하여 최한영· 박팔준· 강석봉 등과 광주 만세운동을 계획함.
발단 시기/일시 1919년 2월 말 - 김필수 목사가 광주로 내려와 최흥종과 김철을 만남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5일 - 최흥종이 서울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힘. 김철· 김강· 최병준 등은 남궁혁 목사 집에 모여 거사 계획을 세움.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10일 - 부동교 아래 작은장터에서 군중 1000여 명이 모여 만세 시위 전개. 일본 경찰이 광주경찰서 앞까지 행진한 시위 군중을 폭력으로 진압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11일 - 숭일학교 학생과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이 선두가 되어 300여 명이 만세 시위 진행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13일 - 광주 큰 장날 장꾼들을 포함한 1000여 명이 대한 독립 만세 고창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13일 - 황상호· 홍덕주· 장호조 등이 『조선독립광주신문』 제작 및 배부
전개 시기/일시 1919년 3월 26일 오후 9시 - 송정면 송정리 정거장에서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 시위 전개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1일 - 비아면, 하남면, 임곡면, 동곡면 등 광주군 각 면에서 봉화 시위 및 만세 시위 진행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8일 -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 거사 전에 일제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됨.
발생|시작 장소 부동교 -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 지도보기

[정의]

1919년 3월 초부터 4월 초까지 전라남도 광주군에서 격렬하게 전개된 만세운동.

[개설]

1919년 일본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을 준비하던 정광호가 「2.8 독립선언서」을 가지고 귀국하여 최한영, 박팔준, 강석봉 등 '신문잡지종람소[이후 삼합양조회로 개칭]' 청년들을 만나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만세운동 준비에 착수하였다. 1919년 2월 말 김필수 목사가 3.1운동 거사준비위원회 광주 지역 거사 밀령을 받고 광주로 내려와 최흥종, 김철[김복현]을 만나 3.1만세운동 계획을 협의하였다. 이후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삼합양조회' 청년들과 합세하여 만세운동을 계획, 추진하였다. 최흥종이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서울에서 구속된 뒤, 김철을 비롯한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기독교인, 학생, 청년들은 거사를 준비하여 3월 10일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역사적 배경]

1910년에 시작해 1918년에 마무리된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전라남도 일대 수많은 농민들이 경작권을 잃게 되었다. 문중이나 마을 소유지, 개인 소유지들이 동양척식주식회사나 전남식산주식회사 등 수많은 일본인 영농회사와 시노야마 후지마키·심평조 등 몇몇 일본인과 회사들에게 넘어갔다. 더불어 강제 면화 재배, 강제 노역 등으로 농민들이 시달렸으며, 1919년 승하(昇遐)한 고종이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며 민심은 더욱 들끓게 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일본 도쿄에서는 유학생들의 주도로 2.8 독립선언이 준비되고 있었다. 2.8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던 유학생 가운데 최원순은 전라남도 광주 출신이었으며, 정상호는 전라남도 화순 출신이었다. 정상호는 국내에서도 2.8 독립선언과 발맞추어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진행하기 위하여 국내로 귀국하였다.

당시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는 정상호, 김복수, 박팔준, 김용규, 한길상, 최한영, 강석봉, 김태열, 강생기 등 10여 명이 모여 비밀결사 독서회 모임인 '신문잡지종람소' 모임을 진행하고 있었다. 독서회 모임이 일제의 주목을 받자 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4가로 장소를 옮겨 '삼합양조장'이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진행하였다. '삼합양조회' 회원들은 역사 공부, 토론 등을 통해 민족 의식을 고취해 나갔으며, 「2.8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국한 유학생 정광호를 만나 3.1운동 준비에 착수하였다.

[경과]

일본 도쿄에서 유학중이던 정광호최원순과 함께 「2.8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1919년 2월 2일 국내로 들어온 뒤 김범수, 김기형 등을 만나 국내에서 배포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2월 4일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김기형의 집인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에서 독립선언서을 다량 인쇄하였으며, 서울로 찾아가 최남선을 만나 도쿄의 2.8 독립선언과 때를 맞춰 국내에서도 거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정광호는 2월 중순경 전라남도 광주에 내려와 정상호를 비롯해 '신문잡지종람소' 회원들을 만나 만세 시위에 대해 협의하였다.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박일구의 처가인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에서 독립선언서 등사를 하던 중 서울에서 김범수 등이 함께 거사를 하자고 제안해 오자, 정광호 등은 독립선언서를 가마니에 담아 광주로 돌아온 뒤 최한영 집에 숨겨두는 등 준비에 착수하였다.

1919년 2월 말 서울에서 김필수 목사가 3.1운동 거사준비위원회로부터 광주 지역 거사에 대한 밀령을 받고 광주로 내려와 최흥종김철을 만났다. 최흥종김철은 서울로 올라가 국기열의 주선으로 청량리 근처에서 김범수 등 여러 청년들과 만나 광주 지역 3.1운동에 관해 협의하였다. 협의를 통해 광주 지역 총 책임자는 최흥종김철이 맡기로 하였으며, 광주 거사일은 큰 장날인 3월 8일 오후 2시로 정하였다. 그러나 3월 1일 서울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던 최흥종이 시위 도중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3월 5일 최흥종의 구속 사실을 확인한 뒤 김철은 광주로 내려와 3.1운동을 준비하였다. 김철은 효천면 양림리 남궁혁 목사 집에서 김강, 최병준, 황상호, 강석봉, 한길상, 최한영, 최영균, 김용규, 서청희, 김태열, 홍승애 등과 모여 3월 8일 광주 큰 장날에 거사할 것을 결의하고 각자 역할을 나누었다. 최한영, 최정두, 한길상, 김용규, 범윤두 등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준비를 맡았고, 서정희는 일반 시민을 동원하기로 하였으며, 김강이 기독교인을 동원하기로 하였다. 홍승애·박애순은 수피아여학교 학생을 동원하고, 최영준이 숭일학교 학생을 동원하기로 하였으며, 기타 학교 학생 동원은 김태열· 최영균· 김용규 등이 맡기로 하였다. 그리고 준비 자금은 이기호가 맡기로 하였다. 그러나 광주에서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준비하기에는 기간이 너무 짧아 거사일을 3월 10일 작은 장날로 연기하기로 하였다.

3월 10일 오후 2시, 부동교 아래 작은 장터에 기독교인,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 학생들,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 시민 등 1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철, 김강 등이 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지산면 일곡리에 사는 이주상, 이문호, 이창호 부자와 범윤두 등이 본촌면 일곡리·우치면 생용리 등지에 사는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대거 합세하였다. 만세 시위는 오후 5시경까지도 숭일학교 학생과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계속되었다. 장꾼과 장사하는 사람들까지 합세하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가(獨立歌)」를 부르며 시위 행렬은 서문통을 지나 본정통으로 향한 뒤 충장로4가에서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 등 군중과 합세해 다시 충장로로 되돌아왔다. 이후 광주우편국을 지나 광주경찰서까지 행진하였다. 시위 군중이 광주우체국 앞에 이르렀을 때 기마헌병대가 출동하여 주동 인사를 체포하였다. 일제는 경찰, 헌병, 재향군인, 소방서원까지 동원하여 시위 행렬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광호를 비롯한 만세 시위 주도자와 시위 군중 100여 명이 붙잡히자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3월 11일 오후 5시, 숭일학교 학생과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이 선두가 되어 300명가량의 군중이 만세 시위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3월 13일 큰 장날에는 장꾼들을 포함한 1000여 명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으며, 그중 일부는 시위 행진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에 대비하여 미리 헌병, 경찰을 배치해두었으며 3월 11일과 3월 13일 시위에서 23명이 체포되었다.

3.10만세운동에 참여했던 황상호는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민중계몽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자신의 별명인 황송우 사장의 명의로 『조선독립광주신문』을 발행하였다. 『조선독립광주신문』의 주요 내용은 전국 만세 시위의 소식과 고종 독살설, 파리강화회의 등 국내외 정세에 대한 것이었다. 황상호홍덕주, 장호조 등과 협력하여 3월 13일 『조선독립광주신문』 제1호를 600부 인쇄한 뒤, 홍덕주는 광주 큰 장터에서, 장호조는 광주 시내에서, 황상호제중원 내에서 시민들에게 배부하였다. 3월 18일에는 『조선독립광주신문』 제2호를 300부 인쇄하여 광주 큰시장에서 시민들에게 배부하는 등 만세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광주 상인들은 만세 시위에 동조하기 위해 3월 26일부터 철시하였다.

3월 26일 오후 9시 송정면 송정리 정거장에서는 서울발 목포행 기차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인근 마을에서는 이에 호응하여 산에 봉화를 올리며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다. 특히 광주군의 비아면·하남면·임곡면·동곡면, 나주군의 평동면·삼도면·본량면 등 각 면에서는 4월 1일까지 매일 밤 봉화가 오르고 만세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4월 8일에는 광주고등보통학교 4학년 학생들의 만세운동 계획이 있었다. 4학년 급장인 최영섭은 류봉식 등 동지 청년들과 함께 4월 8일 오전 10시 자혜의원 앞에서 만세운동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4월 7일과 4월 8일 4학년 학생들은 모두 휴교하였으며, 최종하·김봉수·김길선 등 학생들은 지정 장소에 집합하였지만 일본 경찰이 이를 미리 알고 학생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최영섭 등을 검속하였다.

[결과]

광주 시내를 중심으로 일어난 3.10만세운동은 인근 농촌지대로 확대되면서 봉화투쟁과 횃불시위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 시위도 이어졌다. 광주 3.1운동과 관련되어 104명이 구속되었고, 김복현 외 21인, 박애순 외 76인, 황상호 외 2인,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최영섭, 농업에 종사하던 김순천의 재판으로 나뉘어 재판이 진행되었다.

광주 3.1운동을 주도하였던 김철, 한길상, 최한영 등은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며,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적극 가담하였던 박애순은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조선독립광주신문』을 제작·배포한 황상호는 징역 3년, 홍덕주와 장호조는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참여하였던 농민 김순천은 징역 6월, 4월 8일 자혜의원 앞 만세 시위를 주도한 최영섭은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의의와 평가]

광주 3.1운동은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기독교인과 삼합양조회 소속의 청년 지식인,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주도하였다. 특히 농민, 가게 점원, 대장장이, 안마사, 이발사 등 각계 각층의 민중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광주 인근 농촌 지역의 만세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전개하며 집약되었던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은 1920년대 항일운동으로 이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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