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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094
한자 金容圭
영어공식명칭 Kim Yonggyu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노기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8년 11월 16일연표보기 - 김용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5일 - 김용규 광주 3.1운동 결의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0일 - 김용규 광주 3.1운동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26일 - 김용규 송정리 시위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24년 7월 8일연표보기 - 김용규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9년연표보기 - 김용규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금정 47
거주|이주지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금정 47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

[정의]

일제강점기 광주 3.1운동을 이끈 독립유공자.

[개설]

김용규(金容圭)[1898~1924]는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금정 47[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에서 태어났다. 1919년 김용규남궁혁(南宮赫)의 집에서 직접 독립선언서 등을 인쇄하였다. 1919년 3월 10일 광주 3.1운동을 전개하면서 시위 인원을 동원하고 선언서를 배포하였다. 그리고 궐석(闕席) 재판에 회부되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활동 사항]

광주공립농업학교[지금의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용규는 정락교(鄭洛敎)의 집[구 적십자병원 후문 맞은편]에 문을 연 '신문잡지종람소(新聞雜紙縱覽所)'에서 광주공립농업학교 한길상(韓吉祥), 최한영(崔漢泳), 집주인의 아들인 정상호(鄭尙好), 광주공립보통학교 김복수(金福洙), 서울 유학생 박팔준(朴八俊), 그리고 강석봉(姜錫峰)·김봉렬(金奉烈)·강생기(姜生基) 등과 1년 동안 시국 토론 모임을 개최하였다.

그 후 부래옥(富來屋) 백화점 자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4가]로 옮겨 '삼합양조장(三合釀造場)'이란 간판을 걸고 다시 시국 토론 관련 모임을 이어 갔다. 그러던 중 일본 도쿄[東京]에 유학 중이던 전라남도 광주 출신의 최원순(崔元淳), 정광호(鄭光好), 이이규(李珥圭) 등을 통해 독일의 패전과 미국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소식을 접하였다. 1919년 2월말 서울에서 김필수(金弼秀) 목사가 3.1운동 거사준비위원회로부터 전라남도 광주 지역 거사에 대한 전달 명령을 받고 전라남도 광주에 내려와 최흥종(崔興琮)김철(金鐵)을 만났다.

전라남도 광주 3.1운동의 책임은 최흥종김철이 맡기로 하였다. 최흥종김철은 즉시 서울로 올라갔으나, 최흥종이 만세 시위를 부르다가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어 구속되었다. 그러자 1919년 3월 5일 김철은 서울 유학생인 최정두(崔正斗)와 귀향하여 서울에서의 3.1운동 정황을 전하였다.

1919년 3월 5일 밤 양림동 남궁혁의 집에서 김용규를 비롯하여 숭실학교 교사인 최병준(崔丙俊)최한영(崔漢泳), 김강(金剛), 황상호(黃尙鎬), 강석봉(姜錫奉), 한길상(韓吉祥), 송흥진(宋興眞), 손인식(孫仁植), 김태열(金泰烈), 최영균(崔瑛均), 최정두, 서정희(徐廷禧), 김태열(金泰烈), 홍승애(洪承愛), 삼합양조장의 정광호, 김복수, 박팔준, 최한영, 강생기, 북문안교회 교인 등이 모여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전라남도 광주 큰장날인 1919년 3월 8일에 광주 3.1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자금 담당에 이기호(李起澔), 독립선언문·경고문·독립가·태극기 인쇄는 최한영이 담당하기로 하였다. 일반 시민 동원은 서정희, 기독교인 동원은 김강, 수피아여학교 학생 동원은 홍승애와 교사 박애순(朴愛順), 숭일학교 학생 동원은 최병준이 맡기로 하였다. 김용규김태열, 최영균 등과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기타 학교 학생 동원 책임을 맡았다. 이에 각 학교 학생 및 주민의 시위 참가를 선전하고, 동지들과 최한영을 도와 독립선언서·경고문·독립가 등을 등사하고 거사 연락을 취하였다.

그러나 광주 3.1운동을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하여 다시 작은장날인 1919년 3월 10일 오후 3시 30분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不動橋) 아래의 작은장터에는 기독교인,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광주농업학교 학생 및 주민이 모여들어 광주 3.1운동 시위 군중은 1,000여 명이 넘었다. 이때 김용규는 동지들과 함께 전라남도 광주 남문통(南門通) 일대에서 인쇄물을 배포하고, 독립운동 참가를 권유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며 큰 태극기를 높이 들어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저녁 무렵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 군중과 함께 읍내를 돌아 경찰서 앞으로 행진하자, 일제는 경찰과 기마 헌병을 동원하여 시위 참가자들을 연행한 후 대대적인 검속을 펼쳤다.

김용규는 1919년 3월 10일 광주 3.1운동 이후 일제의 눈을 피하여 1919년 3월 13일의 시위와 1919년 3월 26일 송정리 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6월 16일 일제는 광주지방법원 궐석 재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하였다. 그 후 1923년경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정부는 공훈을 기려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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