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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693
한자 光山金氏
영어공식명칭 Gwangsan Gim Clan
이칭/별칭 광주김씨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정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광산 - 광주광역시
성씨 시조 김흥광(金興光)

[정의]

김흥광을 시조로 하는 광주광역시의 세거 성씨.

[개설]

광산김씨는 조선시대 문과급제자를 269명이나 내 조선조 5대 명문에 속한 집안이다. 사계 김장생(金長生)[1548~1631]과 아들인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1574~1656]이 문묘에 배향되어 명문으로 꼽힌다. 14세 양간공 김연(金璉) 집안을 경상북도 예안파라고도 하며, 그 후손이 김장생으로 13세손이다. 양간공 예안파에서만 문과급제자 170명을 내고 김장생의 셋째 아들 김반(金槃)의 후손에서만 74명의 문과급제자를 냈다.

[연원]

오늘날의 광산김씨는 7세 김의원(金義元)의 후손들이지만, 그의 동생 김의문(金義文)[김약온(金若溫)이라고도 함]은 『고려사』 열전에 나오고 김의문의 형 김의원도 묘지명에 광양인(光陽人)으로 나와 광양김씨와 상대가 겹친다. 광산김씨 집안 14세 김수(金須)김주정(金周鼎)이 삼별초 때 영광과 광주에 연고를 가지고 활동한 기록들이 나와 비로소 광산김씨의 대종을 이룬다. 김수의 아들 김태현(金台鉉)[1261~1330]의 후손들을 문정공파라 하고, 김수의 동생 김주정(金柱鼎)[?~1290] 집안을 문숙공파라 하여 크게 나눈다. 문정공파는 주로 전라도에 많이 살고, 문숙공파는 경상도와 충청도 지방에 많이 산다.

이 세계에 앞서 11세에서 김위(金位)와 김주영(金珠永) 집안이 갈리는데 김위의 후손에서 문숙공, 문정공파가 생기고, 김주영의 집안에서 현재의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중심의 14세 낭장공 김규(金珪)의 후손과 14세 양간공 김연(金璉)[경상도 연안파] 후손이 갈려 나갔다. 이 밖에도 『고려사』에 나오는 김원의(金元義)의 후손 김지숙(金之淑)[1238~1310] 집안과 김구경(金九冏)[1405년 문과 급제], 김유보(金兪甫)[1401년 문과 급제, 대사성 역임] 등의 집안은 상계나 후손이 자세하지 않다. 김의몽(金義蒙), 김예몽(金禮蒙) 등 25명의 문과급제자를 낸 김영(金英) 집안도 상계를 잇지 못하고 사온사직공파라 하여 별파로 취급한다.

『증보문헌비고』나 『씨족원류』는 별파로 취급한 김자빈(金子贇) 집안이 오늘날은 낭장공 김규(金珪)[14세]의 7세손으로 정리되어 광주 충효동 집안의 상계를 잇고 있다. 김자빈은 1368년(공민왕 17)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아들 김한노(金漢老)는 1383년(우왕 9)에 순천의 심효생, 뒷날 태종이 된 이방원과 동과급제하였다. 이 인연으로 이방원의 왕자의 난 때는 항시 동조하였다. 김한로는 딸을 이방원의 큰아들 양녕대군에게 시집보냈으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처갓집 민씨 일문은 물론 양녕대군, 충녕대군[뒷날의 세종]의 장인들까지 역적으로 몰아 죽이거나 귀양보냈다. 이 난리 때 김한노는 나주로 유배된 뒤 죽었는데 아들 두 명이 살아남아 가계를 이은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김한노의 11세손이 충장공 김덕령(金德齡)[1567~1596] 장군이다. 김덕령 집안은 본디 현재의 광주광역시 서구 벽진동에 살았으나, 김덕령의 고조인 김문손이 오늘날의 북구 충효동에 살던 노맹준의 딸에게 장가가 터를 잡았다. 오늘날 이곳 일대를 ‘일동3승’이라 하여 명승지로 지정하고 충효동 건너에 가사문학관이 들어서 있다. 3승 중의 1승은 충효동에 있는 김윤제환벽당이고, 또다른 1승은 김자로의 사위 양산보의 소쇄원이며, 마지막 1승이 가사문학의 상징이 되어 있는 식영정으로, 식영정광산김씨 김성원이 장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이다. 그러므로 이곳 3승은 모두 광산김씨들과 인연을 갖고 있다.

광주에 현존하는 광산김씨의 한 집안은 북구 신창동에 거주했던 김언거(金彦居)[26세, 1503~1584] 집안이다. 김언거의 상대파계는 15세 김태현의 문정공파로 문정공은 네 아들을 낳아 벌족한 가계를 이루었다. 김언거는 넷째 아들 김광로(金光輅)[16세]의 11세손으로 칠계파라고도 한다. 김광로의 7세손이 남구 대촌동 칠석에 세운 부용정[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의 주인공 김문발(金文發)[1359~1418]이다.

[입향 경위]

광산김씨는 국내 김씨 중 3위에 해당하는 본관 성씨로 한때 집안의 선조를 신라 49대 헌강왕[875~886]의 셋째 아들 김흥광(金興光)이라 했으나, 『삼국사기』에 헌강왕이 아들이 없어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으로 기록되어 이를 부정하게 되었다. 오늘날 광산김씨 집안은 헌강왕보다 5대 앞선 신무왕(神武王)의 아버지 김균정이 왕위다툼에 져서 숙청되자 광주로 피신해 와 지내면서 낳은 세 아들 중 큰 아들로 정리하고 있다. 다만 광산김씨 집안은 김흥광(金興光)을 1세조로 하여 7세 김양감(金良鑑)의 아들대에서 김의원(金義元)과 김의문(金義文)으로 나뉜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현황]

광산 본관 인구는 2000년 인구통계로 83만 7000여 명이다. 그중 6만 9689명이 광주에 살고 있고, 거의 같은 수인 6만 9394명이 전라남도에 살고 있어서 집중률을 보이고 있다. 아직 광산 본관에 흡수되지 않은 광주 본관 김씨도 아직 전주에 2만 1926명이 살고 있다. 김해 본관 김씨가 광주에 광산김씨보다 배나 많은 14만 8736명이 살고 있지만, 결속력에서 광산김씨를 당해내지 못할 만큼 절대적이다. 광산김씨 집안은 1914년까지도 광주에 속해 있던 지금의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에 시조단을 만들어 10월 1일 제사지내고 있다. 평장동에 1741년(영조 17)에 세운 광산김씨유허비는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곳에 유허비를 세우게 된 것은 14세 김이(金珥)가 썼다는 글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 평장동 전설은 1792년에 쓴 『광산지』의 고적난에 기록된 설명으로, 이 『광산지』는 광산김씨 김효일(金孝一)이 주관한 책이다. 김이는 김의원의 현손으로 1491년생이지만 후손이 없다. 김이는 선조 김책(金策) 등 여러 선조가 김흥광 시조가 난을 피해 살던 광주의 서일동(西一洞)에서 여러 평장사를 배출해 동네이름이 평장동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서쪽의 한 동네라는 기록 때문이었던지 오늘날의 남구 대촌동 죽령산(竹嶺山)[한재] 기슭 칠석동네가 평장동이라는 주장도 있다.

오늘날의 광산김씨 시조 시거지 평장동은 광주의 서쪽이 아니라 북쪽 50리 거리에 있다. 조선 전기의 지방종합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광산현 인물난에 광산김씨 인물만 23명이 나온다. 이에 견주어 광산김씨 이외 인물은 3명뿐이다. 23명의 광산김씨 인물 중 거의 대부분이 이미 선조의 고향인 광주를 떠나 타향에서 이름을 떨친 인물들이다. 특히 좌의정을 지내고 광산부원군 군봉을 받은 22세 김국광(金國光)[1415~1480]은 이미 경상도 예안으로 터를 옮겼던 14세인 양간공 김연의 후손이다. 사계 김장생의 5대조인 김국광은 19세 김약채(金若採) 때 충청남도 연산으로 옮겨간 먼 집안이다.

[관련 유적]

광산김씨유허비(전라남도 기념물)가 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3.04.11 내용변경 [연원] 김덕형→김덕령, [입향 경위] 김흥광이 시조라 했으나→김흥광이라 했으나, [현황] 조선 후기→조선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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