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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항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826
한자 六三抗爭
이칭/별칭 한일회담 반대운동,6.3시위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연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64년 3월 24일연표보기 - 6.3항쟁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64년 6월 3일연표보기 - 6.3항쟁 종결
발단 시기/일시 1964년 3월 - 한일회담 재개 결정
전개 시기/일시 1964년 5월 15일 -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 총학생연합회 결성
전개 시기/일시 1964년 5월 27일 - 전남대학교 학생 한일회담 반대시위
전개 시기/일시 1964년 6월 4일 -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 광주교육대학 등 광주시내 대학생뿐만 아니라 일부 고등학생들까지 시위 가담
전개 시기/일시 1964년 6월 5일 - 학생 시위대 계림파출소 앞에 재집결하여 연행 학생 석방 요구 시위 돌입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2년 2월 15일 - 제1차 한일회담 개최

[정의]

1964년 박정희 정부의 한일회담 진행 및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하여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일어난 시위.

[개설]

6.3항쟁은 박정희 정부의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하여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역사적 배경]

한일회담[1952년부터 1965년까지 총 7차례에 걸쳐 개최되었던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외교 교섭]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는 1964년 5월 15일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 총학생연합회'가 결성되면서 더욱 격화되었다.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 총학생연합회 학생들은 미군에게 최루탄 공급 중지를 요구하고, 박정희 정부의 '민족적 민족주의'에 대한 반대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대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 시위는 박정희 대통령의 하야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 시작은 1964년 5월 27일 전남대학교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되었다.

[경과]

1964년 5월 27일 오전 8시경 계림파출소 옆 버스 정류장에서 전남대학교 학생 200여 명은 '신망 잃은 박정권의 하야를 권고한다.'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박정권 하야"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돌입하였다. 하지만 시위는 곧 경찰의 폭력적 진압과 이에 맞서는 학생들의 투석전으로 유혈 사태에 이르렀으나, 주변 학생들의 합세로 경찰의 저지선이 붕괴되고 시내로 진출하기에 이르렀다. 시위 학생들은 충장로전남대학교 의과대학→ 광주세무서광주경찰서전라남도청 경로로 이동하여, 전라남도청 앞 광장을 점거하고 연행된 학생들을 석방하라며 연좌 농성을 벌였다. 이에 경찰이 그날 연행한 학생들을 풀어주었으며, 학생 시위대 측은 '광주학생구국투쟁위원회' 명의로 결의문과 선언문을 낭독하고 해산하였다.

전라남도 광주시 대학생들의 시위는 6월 4일 정점에 이르렀다. 이날 시위는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 광주교육대학 등 당시 광주시의 모든 대학생뿐만 아니라 일부 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가담하여 규모가 5000여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들 시위대는 경찰의 최루탄에 돌멩이로 응수하는 한편, 군 트럭을 탈취하여 전라남도청 앞의 바리게이트를 돌파하기도 하였다. 또한 같은 날 오후 2시부터는 사직공원 4.19혁명기념탑 앞에서 100명의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단식 농성에 돌입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다음날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연행되었다.

6월 4일 사태가 격화되자 광주시내의 대학 및 고등학교는 임시 휴교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휴교령에도 불구하고 6월 5일, 학생들은 다시 계림파출소 앞에 집결하여 연행 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에 돌입하였다. 정오 무렵, 학생 시위대가 모여 있는 전라남도청 광장에 무장 군인을 싣고 기관총을 장착한 20여 대의 군 트럭이 시내로 들어오자 학생들은 동요하게 되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시위대의 일부는 교수들의 설득으로 귀가하였다. 현장에 남아 있던 나머지 학생들은 오후 2시 30분경, 경찰에 포위되어 거의 전부가 연행되었다.

[결과]

1964년 6월 4~5일의 시위로 광주시에서는 총 338명이 연행되고 이들 중 8명이 구속 입건, 47명이 불구속 입건되었다. 이들 가운데 최종적으로 전남대학교 학생 이홍길, 감창호, 박종희, 민경수, 안청수 5명만 불구속 기소되었으나, 이들도 검찰이 공소를 취소하면서 일단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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