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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학회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762
한자 湖南學會
영어공식명칭 Honam academic society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손영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07년 7월연표보기 - 호남학회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09년연표보기 - 호남학회 해체
최초 설립지 호남학회 - 서울 대동문우회관
성격 사회단체
설립자 고정주, 강엽 등

[정의]

1907년 광주광역시에서 결성된 애국 계몽 단체.

[개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실력양성을 강조하는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자 서울의 호남 출신 인사들에 의해 조직된 단체이다.

[설립 목적]

호남 지역의 계몽과 교육 발달을 주요한 목표로 하여 조직되었다.

[변천]

호남학회는 1907년 7월 발기인 강엽(姜曄)·백인기(白寅基)·고정주(高鼎柱)·윤경중(尹敬重)·이간(李侃)·박영결(朴榮結)·최우락(崔禹洛) 등에 의해 설립되었다. 1909년 호남학회는 해체하고 중앙학회에 편입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호남학회는 1907년 창립 이후 전북 지역 출신 223명, 전남 지역 출신 153명의 본회 회원과 전라북도지회 회원 24명을 두었다. 호남학회의 기관지인 『호남학보』는 제 9호까지 발행되었고 여론 형성을 통해 애국계몽을 주도하고자 하였다. 호남학회는 실력양성을 위해 신학문의 수용과 함께 신교육 실시를 강조했으며, 창평의 창흥학교 등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에 사립학교 설립을 주도하였다.

또한 국권회복의 방법으로 식산흥업을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여 『호남학보』에 ‘농학설’을 연재하기도 하였다. 3년 이내에 측량 청원을 해야만 민유지의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는 칙령이 반포되자 호남학회 내에 측량학교를 설립하여 측량기사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학회 내에 법학강습소도 설치하였다.

[의의와 평가]

호남학회는 실력양성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창립하였으나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호남학회가 강조한 학교 설립 등의 신교육 운동은 1920년대 광주 지역을 비롯한 호남에서 전개된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을 지도하는 이들을 배출하는 값진 결실을 맺었다고 평가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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