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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200
한자 李鉉周
영어공식명칭 Lee Hyeonju
이칭/별칭 이운정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노기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9년 9월 15일연표보기 - 이현주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8년 1월 - 이현주 김태원 의병진 합류
활동 시기/일시 1908년 2월 2일 - 이현주 무동촌 전투 참전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이현주 토천 전투 참전
활동 시기/일시 1909년 - 이현주 어등산 전투 참전
몰년 시기/일시 1930년 2월 15일연표보기 - 이현주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0년연표보기 - 이현주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이현주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전라도 광주목
활동지 무동촌 - 전라남도 창평군
활동지 토천 - 전라남도 장성군
활동지 어등산 - 전라남도 광산군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김태원 의진 포수

[정의]

개항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개설]

이현주(李鉉周)[1879~1930]는 1879년(고종 16) 전라도 광주목[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출신이다. 이명은 이운정(李運正)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모집하여 1908년 김태원(金泰元) 의병진에 합류하였다. 1908년 김태원 의병장 지휘 아래 어등산(魚登山) 전투에서 일본군 지휘관과 병사 수 명을 사살하였다. 김태원 의병장 순국 후 부대를 나누어 소규모 부대로 활동하다가 1909년 어등산에서 교전 중 중상을 입어 의병 활동을 중단하였다.

[활동 사항]

이현주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여 의병을 모집하였다. 1908년 1월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 김태원 의병진에 합류하였다.

한편, 일제는 1908년 1월 24일부터 15개 부대를 동원하여 대규모 군사작전을 전개하였다. 김태원 의병진은 일본군 광주 수비대장 요시다카츠산신[吉田勝三郞] 소좌의 대규모 병력에 쫓기게 되었다. 이현주김태원 의병진에 포수로 배속되어 의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전라도 창평현 외남면 무동촌(茂洞村)[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 가사문학면 무동리]에 유진(留陣)하였다. 무동촌은 주변에 무등산이 있어 깊은 계곡과 높은 산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는 지형이다. 따라서 유격 전술을 구사하기 좋은 천연 요새일뿐 아니라, 주변 마을로 통하는 주요 길목이기도 하였다.

1908년 2월 2일 이현주김태원 의병장의 명령에 따라 무동촌 마을 입구 돌담에 매복하고 있었다. 이때 요시다[吉田] 소좌가 선두에서 군도를 휘두르며 말을 타고 마을로 진격하였다. 김태원 의병장은 돌담에 매복 중인 이현주를 비롯한 포수에게 천보총(千步銃)을 발사하도록 신호를 주었다. 요시다 소좌는 의병부대의 집중 사격으로 사살되었다. 일본군이 크게 동요하며 남쪽 송계마을 방향으로 퇴각하자 이현주김태원 의병장의 동생 김율(金聿)과 함께 일본군을 공격하여 수 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호남창의회맹소 기삼연(奇參衍) 의병장이 순창에서 체포되어 순국하자, 김태원 의병장은 의병부대를 '호남의소(湖南義所)'라는 이름으로 재무장하고 전력을 강화하였다. 이후 이현주는 포수로 전라남도 장성 토천(土泉) 전투에서 일본군 테츠도산다[鐵道三田] 등 수십 명을 포살하는 데 앞장섰다.

1908년 일제는 이현주 의병이 소속된 호남의소를 토벌하기 위해 3월에 제2특설 순사대를 편성하고, 4월 19일 광주 수비대를 중심으로 8개 종대를 편성하여 탄압 작전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4월 25일 김태원 의병장은 병력의 열세로 전라남도 광산군 어등산[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운수동 일대] 어귀에서 전사하였다. 1909년 이현주는 여러 동지들과 부대를 나누어 소규모 부대로 활동하던 중 어등산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큰 부상을 입어 의병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0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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