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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124
한자 宋學默
영어공식명칭 Song Hakmuk
이칭/별칭 자화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병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1년연표보기 - 송학묵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7~1909년 - 송학묵 김동수 의병부대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09년 11월 30일 - 송학묵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 선고받음
몰년 시기/일시 1910년 5월연표보기 - 송학묵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0년연표보기 - 송학묵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전라도 광주목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김동수 의병부대 의병

[정의]

대한제국기 전라남도 광주 출신의 의병.

[개설]

송학묵(宋學黙)[1871~1910]은 전라도 광주목[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본촌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화(子化)이고 본관은 홍주(洪州)이다. 김동수(金東洙) 의병부대에 소속되어 전라남도 광주를 비롯한 인근 5개 군을 넘나들며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일제에 체포되어 교수형을 받았다.

[활동 사항]

1907년 김동수는 이원오(李元五), 조경환(曺京煥), 양상기(梁相基) 등과 함께 전라남도 광주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였으며, 1908년 양진여(梁振汝)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1908년 음력 12월 양진여 의병장의 지휘 아래 송학묵김동수, 김재민(金在珉), 임윤오(林允五), 임윤팔(林允八) 등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전라남도 광주군 갑마보면의 면장 집에 들어가 군수품을 징발하였다. 1909년 음력 1월 다시 전라남도 광주군 갑마보면 복용리에서, 1909년 2월 하순에는 전라남도 광주군 오치면에서, 1909년 3~4월에는 전라남도 광주군·순창군 등지에서 군자금과 군수품 징수 활동을 벌였다.

김동수 부대는 다시 양진여 의병부대에서 나와 60여 명이 전라남도 화순군을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1908년 5월 19일에는 50여 명의 군사를 지휘하여 전라남도 광주군 덕산면에서 일본군 헌병대 광주분견소의 일본군들과 접전을 벌였고, 1908년 5월 31일에도 광주경찰서의 일본인 경찰대와 광주군 갑마보면 본촌에서 교전하였다.

송학묵김동수 의병부대에 소속되어 전라남도 광주를 비롯한 인근 5개 군을 넘나들며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일제에 체포되어 광주감옥에 구금되었다. 하지만 동료들과 함께 탈옥을 시도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1909년 11월 30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받았으며, 1910년 5월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송학묵은 처형되기 전 "내가 비록 너희들 칼 앞에 쓰러지나 조금도 유감이 없다. 내가 죽은 뒤에 내 넋이 너희 나라에 들어가 너희 국민을 도륙할 것이니 너희 나라가 망하는 날 나의 혼이 길이 살아 있음을 알리라."라고 꾸짖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200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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