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267 |
---|---|
한자 | 住生活 |
영어공식명칭 | Housing Life |
분야 | 생활·민속/생활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영미 |
[정의]
광주광역시의 주택과 주거지에서의 삶.
[개설]
주택은 과거로부터 지역 문화를 근간으로 한 시대의 생활 질서를 반영한다. 주거란 본질적으로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고 생활을 담는 그릇으로서, 또 새로운 시대적 변화 요구를 담아내며 진화한다. 역사 속에서 주거의 형태를 살펴볼 수 있는 문헌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 옥사조(屋舍條)와 『고려도경(高麗圖經)』의 민거조(民居條), 와탑조(臥榻條), 『고려사(高麗史)』의 형법 금령조(禁令條)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주거 건축의 형태가 고려시대까지 형성되어 온 주택 구조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발달하였는데, 이는 목조가구식 양식과 온돌과 마루라는 두 가지의 바닥 요소로 특징지을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의 인문·사회적 환경의 영향으로 주거 건축도 기본 구조의 바탕 위에서 서서히 변화를 가지게 되는데, 이는 가산국가(家産國家)로서 엄격한 사회 신분 제도나 정치 기구가 마련되어 주거 건축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이러한 사회 신분 제도를 바탕으로 주거 건축은 몇 가지로 구별되는데, 일반 백성들의 집인 서민주택과 중인들의 집인 중류주택, 최상위의 계급인 양반의 상류주택, 양반집에서 거주하는 외거노비의 집인 가랍집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상류주택과 중류주택의 구분은 가대 및 가사 규제의 문란과 경제적 여건에 따른 생활 정도의 차이, 그리고 지역적인 차이 등이 요인으로 작용되어 영향을 주었다. 통상 중·상류주택을 통합하여 반가(班家)라고 칭하고 서민주택을 민가(民家)라고 한다.
한편, 주거 건축은 지역적 자리와 특성에 따라 유형을 분류하는데, 한반도를 남부, 중부, 북부로 나누어 주거 건축도 분류한다. 호남 지역의 민가는 남부형으로 유형화하고 있으며, 남부형의 주거 건축의 평면은 ‘一’ 자형, ‘二’ 자형, ‘ㄴ’ 자형으로 구분한다. 한반도의 남부를 점하고 있는 호남 지역의 주거 건축은 과거 대다수의 학자들은 ‘一’ 자형으로 유형화하였지만, ‘ㄷ’ 자형, 혹은 ‘H’ 자형 평면을 제시[전봉희]하기도 하며, 남부형도 도서지방과 내륙지방, 산간지방으로 나누어 평면 형식을 비교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주택의 변화는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과 외래로부터 근대화가 유입되는 환경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시대적 변화 요구에 따라 독특한 과정을 거쳐 재래 주택이 현재의 주택 모습으로 탈바꿈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주택은 광복을 경계로 재래의 주택 질서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재래 주거 문화가 근대라는 새로운 주거 요구를 수용하여 재조정되는 근대화 과정이 있었다는 함의를 가진다. 광주광역시에 근대화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곳으로 양림동을 들 수 있으며, 일본인뿐만 아니라 기독교 선교사들이 양림동을 중심으로 서양촌을 형성하였다.
유진 벨(Eugene Bell)[한국명 배유지(裵裕址)]이라는 미국 남장로회(南長老會)의 선교사와 클레멘트 오웬(Clement Owen)[한국명 오원(吳元)]이라는 의사가 목포를 통하여 1904년 양림동에 서양촌을 형성하였다. 양림동은 서양인들이 개간하여 지금의 푸른동산으로 만들었다. 1905년에 시작하여 10년 후인 1914년까지 양림동에 9동의 주택, 1동의 병원, 2개의 학교, 1개의 성경학교 건물이 지어졌다. 그 당시에 건립되어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수피아홀, 오웬기념관, 벨기념관, 선교사 사택 등이다.
새로운 건물들이 신축되기 이전에 외국인들은 조선가옥을 매점하여 순수한 주거 기능에 새로운 타기능을 부가·개조시킨 주거 겸용 건물로 사용하였다. 이들은 조선가옥을 사들인 뒤 목재기둥 사이의 벽을 벽돌과 유리로 채운다든가, 학교나 종교 건물에서 비교적 넓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하여 문턱을 없앤다든가 방을 튼다든가 하여 간단한 개조부터 하였다. 이러한 예는 최초로 교회를 열었던 양림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교육을 받은 지식층들은 서구나 일본에 대한 지식을 통하여 기능적인 주생활을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우리의 전통적인 가족 제도와 가족 생활에 대한 고민을 하였으나, 위생적인 것에 더욱 많은 관심을 두었다. 이와 같이 외국인들의 거주, 토지, 가옥의 취득이 가능해지면서 많은 시설물들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의 거류지 건축은 다소나마 현 도시 구조의 기본틀을 형성하며, 당시의 지구(地區) 및 필지 분할(筆地分割) 등 도시 맥락과 건축 유형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근대화 시대〉
우리나라의 주생활의 변화에 따른 건축의 변화를 살펴보면, 광복 이전엔 재래 전통한옥의 칸으로 평면과 공간을 구축하는 목구조 방식에서 한옥에 위생 공간이나 현관 등과 같이 예전에 없었던 요소를 재래식 주택 구조에 첨가하는 방법과 새로운 기능을 수용하기 위하여 칸이나 채를 늘려 가는 방법으로 변화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평면의 유형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이후 목구조 기법의 구조적, 평면 계획적인 제약에서 벗어나 서양식처럼 마루를 주거 공간의 중심으로 놓고, 실들을 살림의 규모에 따라 크기를 변화하는 방법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즉 마루 중심의 평면형이 형성되었다. 이는 콘크리트 방식이 주택건축에 일반화되면서 근대 주거 유형으로 성립되었다. 단독주택과 아파트에서도 모두 이러한 주거 공간의 형태가 형성되었다. 한편, 일제강점기 이후, 주택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아파트가 대량 보급되면서, 이러한 평면 형태는 아파트에 이식되어 우리의 보편적인 주거 공간의 형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