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770
한자 金國光
영어공식명칭 Kim Gukgwang
이칭/별칭 관경(觀卿),서석(瑞石),사지제일(事知第一),정정(丁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창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15년연표보기 - 김국광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38년 - 김국광 진사 입격
활동 시기/일시 1441년 - 김국광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41년 - 김국광 승문원정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47년 - 김국광 사헌부감찰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50년 - 김국광 승문원교리, 봉상시판관 역임
활동 시기/일시 1455년 - 김국광 좌익원종공신 3등 책록
활동 시기/일시 1461년 - 김국광 병조참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64년 - 김국광 호조판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67년 - 김국광 적개공신 2등 책록, 광산군 책봉
활동 시기/일시 1469년 - 김국광 우의정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70년 - 김국광 좌의정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71년 - 김국광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 책록, 광산부원군 책봉
몰년 시기/일시 1480년연표보기 - 김국광 사망
추모 시기/일시 1480년 - 김국광 시호 정정(丁靖) 추증
묘소|단소 충청남도 계룡시 두마면 왕대리 산21-1
사당|배향지 김국광사당(金國光祠堂)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148
사당|배향지 모원재(摹遠齋) - 충청남도 계룡시 두마면 왕대2길 6-10
사당|배향지 영사암(永思庵) -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18
성격 문관
성별
본관 광산(光山)
대표 관직 우의정(右議政)|좌의정(左議政)

[정의]

조선 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좌의정,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김국광(金國光)[1415~1480]의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관경(觀卿), 호는 서석(瑞石), 시호는 정정(丁靖)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김약채(金若采), 할아버지는 김문(金問), 아버지는 영의정을 역임한 김철산(金鐵山), 어머니는 김명리(金明理)의 딸 안동김씨(安東金氏)이다. 부인은 황보신(黃保身)의 딸인 정경부인(貞敬夫人) 장수황씨(長水黃氏)이다. 김국광은 4남 3녀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은 김극유(金克忸), 둘째 아들은 김극니(金克怩), 셋째 아들은 김극수(金克羞), 넷째 아들은 김극괴(金克愧)이며, 첫째 딸은 이한(李悍)에게, 둘째 딸은 이혜(李譓)에게, 셋째 딸은 송여림(宋汝霖)에게 출가하였다.

[활동 사항]

김국광은 1415년(태종 15)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태어났으며, 1441년(세종 23)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와 정자(正字)를 거쳐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김국광은 황해도와 전라도에 도사로 나갔다가 중앙으로 돌아와 사헌부, 성균관, 홍문관 등의 여러 보직을 경험하였으며, 명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김국광의 생애에서 중요한 분기점은 세조의 즉위이다. 김국광은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을 인정받아 좌익원종공신 3등에 책봉되었다. 『세조실록』에 보이는 김국광의 졸기에 따르면, 세조가 김국광의 박학다식함에 감복하여 ‘사지제일(事知第一)’ 네 글자를 친히 써서 줄 정도로 세조의 신임을 받았다. 1467년(세조 13)에는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봉되었으며, 이때 광산군에 봉하여졌다.

1468년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김국광은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 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원상(院相)의 한 사람으로서 예종 초의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 후 좌찬성(左贊成)을 거쳐 우의정(右議政), 좌의정(左議政)에 임명되는 등 정치 최전선에서 활동하였으며, 1470년(성종 1)에는 사은사로 명에 다녀왔다. 특히 성종의 즉위를 지지한 공을 인정받아 1471년(성종 2)에는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에 책록되었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그러나 이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동생 김정광(金廷光)과 사위 이한(李垾)이 장죄(贓罪)[뇌물죄]를 지은 것을 알고 스스로 사직하였는데, 다만 성종의 신임으로 원상의 지위는 유지하며 국정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동생과 사위의 과거 부정행위로 인하여 삼사의 탄핵 요구가 빗발치자 김국광은 다시 사직하였다.

『정조실록』 등에는 김국광이 세조 때 『경국대전』 편찬에 참여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특히, 함안 사람 최옥산(崔玉山)이라는 자가 자기 아버지를 죽였다는 이유로 옥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김국광이 이 사건을 재심하여 최옥산의 누명을 벗게 해 주었다는 이른바 ‘최옥산 살부사건(殺父事件)’은 김국광이 세조의 신임을 얻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김국광은 죽은 뒤 정정(丁靖)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정(丁)은 ‘뜻을 펴되 성취하지 못한다’, 정(靖)은 ‘공손하여 말을 적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학문과 저술]

일제강점기인 1922년 김국광의 14대손 김철현(金喆鉉) 등이 김국광의 유고와 행장, 제문 등을 모아 『서석실기(瑞石實紀)』를 편집·간행하였다. 『서석실기』는 총 5권 1책으로, 현재 성암고서박물관[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1가 60-17]에 소장되어 있다.

[묘소]

김국광의 묘소는 충청남도 계룡시 두마면 왕대리 산21-1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국광은 죽은 후 정정(丁靖)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는 김국광사당(金國光祠堂)은 1483년(성종 13)에 건립되었으며, 정면 3칸, 옆면 3칸 규모에 맞배지붕 건물이다. 1992년 10월 28일에 논산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충청남도 계룡시 두마면에 있는 모원재(摹遠齋)는 김국광의 재실로 1623년(인조 원년)에 건립되었으며, 정면 4칸, 옆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1989년 4월 20일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에 있는 영사암(永思庵)은 김국광김겸광 형제가 시묘살이를 하였던 곳에 지은 암자인데, 지금은 광산김씨 사당으로 쓰이고 있다. 1475년(성종 6)에 건립되었으며, 정면 4칸, 옆면 2칸 규모에 홑처마가 있는 팔작지붕 건물이다. 충청남도 시도유형문화재이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