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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720
한자 衡平運動
이칭/별칭 형평사 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소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3년 5월 25일연표보기 - 형평사 광주지사 설립
종결 시기/일시 1935년 4월 24일연표보기 - 형평사에서 대동사로 개칭
전개 시기/일시 1926년 2월 18일 - 광주형평청년회 결성
전개 시기/일시 1933년 1월 25일 - 형평사 광주지사 수색 및 형평사원 검거
성격 사회 운동
관련 인물/단체 광주형평청년회|서정희

[정의]

1923년부터 1935년까지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 일어난 형평사 운동.

[역사적 배경]

형평운동(衡平運動)은 백정(白丁)들의 인권 존중과 신분 해방을 주창한 운동이며, 1923년 4월 25일 경상남도 진주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경장 이후 불평등한 신분 질서는 폐지되었으나, 관례에 의한 신분 질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형평운동3.1운동 이후 국민 계몽과 인권 운동에 앞장선 지식인들이 가세하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26년 전국에 설립된 형평사(衡平社) 지사가 130개에 이르렀고, 1930년에는 165개로 늘어났다. 일제에 의해 해체되었으나, 훗날 형평운동은 청년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며 사회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1923년 5월 25일 전라남도에서 가장 먼저 형평사 광주지사가 창립되었다.

[경과]

경상남도 진주 지역에서 형평운동이 시작된 지 4개월 뒤인 1923년 전라북도 정읍지사에서 온 3인의 선전원이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북문통[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2가] 만세암(萬世庵)에 백정 30여 명을 모이게 하고, 형평사의 취지를 설명하여 광주지사를 설립하였다. 지사장에 남상도(南相度), 고문에는 서정희(徐廷禧)를 선출하였다. 서정희는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 겸 광주소작인회 집행위원장으로서 광주 지역의 형평운동 지지 세력을 주도하였다.

형평사 광주지사는 총회에서 인근 12개의 다른 사회 운동 단체의 지지를 받으며 사회 운동 단체의 결집력을 이끌었다. 1926년 2월 18일 광주청년회의 간부이며 당시 서방공립보통학교[지금의 광주수창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김갑수(金甲洙)가 회원 50명을 규합하여 광주형평청년회를 결성하고 면 단위까지 조직을 확대하였다. 김갑수는 1931년 8월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교사리[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양동]의 전남도시제사공장에 격문을 붙인 사건으로 수감되기도 하였다.

광주형평청년회는 조우회(朝友會)라는 형평사 축구팀을 창단해 축구를 통한 인권 형평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조우회는 당시 『조선일보』 주최의 남조선축구대회를 비롯하여 도 내외의 대회에 빠짐없이 출전하며 '스포츠 형평'을 통한 인권 운동을 선도하였다.

[결과]

형평운동은 1931년 만주사변을 겪으면서 일제에 의한 수난을 겪게 된다. 형평사원들은 군수물자의 원료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가죽 원재료를 일본 군부에 공급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 경찰은 백정들이 세력을 형성하거나 조직화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1933년 광주를 중심으로 모종의 비밀결사대가 조직되었다는 이유로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부터 100여 명의 형평사원들을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검거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체포된 형평사원들은 혹독한 고문 끝에 14명이 구속 기소되고, 27명이 불구속 기소되었으나, 구속 3년 2개월 만에 열린 공판에서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를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衡平靑年前衛同盟事件)이라고 하는데, 무고로 옥중생활을 강제하여 조직 와해를 유도한 것이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힘을 잃어가던 형평운동은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을 계기로 크게 위축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형평사는 사원들에 대한 저금리 자금 지원, 상호부조 등을 위한 동인공제사(同人共濟社) 설치, 피혁조합과 수육판매조합 설립, 비 백정 출신업자의 참여 저지 등의 활동으로 부흥을 꽤하였다. 결국 1935년 4월 24일 형평사 전국대회에서 조직의 명칭이 대동사(大同社)로 바뀌게 되고, 이후 일제에 군용 비행기 '대동호'를 헌남하는 등 친일 조직으로 전락하고 만다.

[의의와 평가]

형평사 광주지사는 전라남도에서 가장 먼저 설립되었으며, 순천·함평 지사와 함께 전라남도의 주요 지사로서 형평운동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이었다. 노동 운동뿐만 아니라 농민·청년 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인물들이 형평운동에 관여하기도 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광주형평청년회 창립식에서 인근 12개 사회 운동 단체가 직접적인 표명을 하였던 것을 통해서, 사회 운동과의 연계가 활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정들의 신분 해방뿐만 아니라 계급 해방에도 관심을 가지고, 형평운동이 모든 계층을 망라한 운동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하지만 광주 형평운동의 구체적인 활동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는 한계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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