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묘유서석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944
한자 辛卯遊瑞石錄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
집필자 고성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857년 - 이연관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935년 - 이연관 사망
배경 지역 무등산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지도보기
성격 기행문
작가 이연관

[정의]

근대 학자인 이연관이 전라도 광주 지역에 있는 무등산을 유람하고 지은 글.

[개설]

「신묘유서석록(辛卯遊瑞石錄)」을 지은 이연관(李淵觀)[1857~1935]의 자는 동국(烔國), 호는 난곡(蘭谷),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아버지는 이인석(李麟錫), 어머니는 노씨(盧氏)이며, 유복자로 태어났다. 언제나 책을 가까이하였으며 행동을 조심하였다. 18세부터 문장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1910년 국권피탈 후 세상과 인연을 끊고 지냈다. 저서로 『난곡유고(蘭谷遺稿)』 2권이 전하는데, 제1권에는 시(詩)와 서(書), 제2권은 부록으로 행장 및 제문 등이 실려 있다. 무등산 유람기인 「신묘유서석록」은 제2권에 실려 있다.

[내용]

「신묘유서석록」은 유산의 동기, 주상절리의 형상, 무등산 호랑이의 존재 확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유산의 동기

이연관은 1891년 늦봄에 세 명의 벗과 함께 무등산에 올랐다. 사계절 중에서 무등산의 봄이 특히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2. 주상절리의 형상

서석대입석대, 광석대, 풍혈대, 주검굴, 용추동 등의 생김새뿐만 아니라 이연관 자신의 소회 등을 표현하였다.

3. 무등산 호랑이의 존재 확인

이연관은 원효암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는데, 그날 호랑이 울음소리를 들었다. 산을 울리는 소리였으며, 사찰의 승려에게서 호랑이 울음소리라는 것을 확인한다.

[전문 일부]

일찍이 시인과 문사들의 자랑하는 말을 들어보면, 호남의 승경 중 봄은 광주의 무등산이요, 가을은 장성의 백양산이다. 그런데 신묘년 늦봄 그믐날에 멋진 선비인 박성의·임장준·송재담 등 몇 명의 벗은 학창의 옛 벗이면서 중표(中表)의 정이 있을 뿐만이 아니었는데, 찾아와 동반하자고 요청하였다. 나도 답청을 한 지가 꽤 오래인지라 바로 그날 길을 떠나 경호 물가를 지나갔다. 이날따라 일기가 청명하고 수세가 광활하여 푸르고 연한 연잎들이 물 위에 새로 나 있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연잎은 물 위의 돈이다.’라는 것이었다. 몇몇 고기 잡는 늙은이들이 그늘을 의지하고 앉아서 어떤 사람은 향기로운 낚싯밥을 던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은빛 고기를 낚아 올리기도 하였다. 지팡이를 멈추고서 우두커니 서서 갈 길을 잊고 있다가 억지로 대지팡이를 끌어 광산성 안으로 들어갔다.

남문에 올라 성안의 풍물을 내다보니 집들이 즐비하고 사람 사는 기척이 자욱하여, 누사의 장려함과 말소리와 얼굴빛의 번화함이 진실로 곧 남쪽 지방의 작은 강남이었다. 고개를 들고 멀리 바라보니 장원봉은 문장의 빼어난 기색이 있었고, 극락포는 부귀의 깊은 근원이 있었다. 난간에 기대어 잠시 쉬니 시야가 처음으로 열리고, 가슴속이 넓어졌다. 풍물을 살핀 후 내려와 누대 아래의 주막으로 들어가니 화로 머리에 노파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술을 청하여 두세 잔을 마신 후에 느린 걸음으로 길을 걸으니 발이 작은 수레인 듯하였다. 술의 흥취가 무르익은 데다가 정다운 벗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지팡이를 들어 새를 쫓고, 돌을 던져 물고기를 맞추니 나들이의 괴로움과 길의 험함을 알 수 없었다. 산속 몇 리를 가다 보니 잔잔한 물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더니 선경이 비로소 열렸다. (후략)

[특징]

「신묘유서석록」에서 주상절리에 대한 묘사는 다른 무등산 관련 유산기에 비하여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다른 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주검굴과 용추동을 언급하였다는 점, 호랑이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점 등이 특징적이다.

[의의와 평가]

「신묘유서석록」은 1891년 당시 무등산의 절경을 세세하게 기록하였으며, 다른 무등산 관련 유산기와 다른 행적을 가진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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