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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충사중수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843
한자 褒忠祠重修記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남구 포충로 767[원산동 947-4]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희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작 시기/일시 1879년 4월연표보기 - 포충사중수기 제작
현 소장처 포충사 - 광주광역시 남구 포충로 767[원산동 947-4]지도보기
성격 현판
재질 나무
크기(높이,길이,너비) 87㎝[높이]|42㎝[너비]
소유자 포충사
관리자 포충사

[정의]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에 있는 포충사의 중수 기록을 새긴 현판.

[개설]

포충사중수기는 1879년(고종 16) 4월에 고경명의 8세손 고시원(高時源)이 지은 글을 현판에 새긴 것이다. 고시원은 1857년(철종 8) 포충사 중건을 주간하였는데 1879년에 60여 일에 걸쳐 중수할 때도 주간하였다. 중수기문에 이어 1960년 3월에 고시원의 증손 고윤주(高允柱)가 지은 추기문이 있다.

1879년 제작된 포충사중수기 현판과 함께 1919년[고광수 찬(撰)], 1926년[고정주 찬], 1927년[오준선 찬], 1933년[김영한 찬], 1970년[고윤주 찬] 등의 중수기문 현판이 있다. 1919년 중수는 1월에 시작하여 4월말에 마쳤는데 정당[신실], 동서재실, 충효당, 노복의 방을 중수하였다.

[형태]

액자 형식 판재의 변죽에 꽃무늬를 그려 넣고 29행을 새겼다.

[현황]

포충사임진왜란 때의 호남 의병장 고경명과 아들 고종후, 고인후, 그리고 유팽로, 안영을 배향한 사우(祠宇)로 1601년 창건하였고, 1603년에 사액을 받았다. 포충사고경명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사우를 보존·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 사액 사우의 수리와 보존 관리 현황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자료로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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