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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알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220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중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958년 - 이미란 출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2007년연표보기 - 「말을 알다」 발표
편찬|간행 시기/일시 2007년 - 「말을 알다」 『문학들』 2007년 겨울호에 수록
편찬|간행 시기/일시 2009년 - 「말을 알다」 『꽃의 연원』에 수록
성격 단편 소설
작가 이미란

[정의]

소설가 이미란이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쓴 단편 소설.

[개설]

「말을 알다」는 중국에서 교환교수로 재직 중인 장형수가 미국인 교수 부인인 옌쯔량과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과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다루고 있다. 2007년 『문학들』 겨울호에 발표하였다. 2009년 이미란의 작품집 『꽃의 연원』에 수록되었다.

[저자]

이미란[1958~]은 1983년 『광주일보』와 1985년 『서울신문』의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창작집 『꿈꾸는 노래』[1994], 『네 손을 위한 소나타』[2000], 『그림자 사랑』[2003], 『너를 찾다』[2004] 등과 저서 『한국현대소설과 패러디』[1999], 『소설창작 12강』[2001] 등을 발표하였다. 1997년에 광주문학상을, 2009년에 광주일보문학상을 받았다. 2021년 기준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구성]

「말을 알다」는 모두 5개의 의미 단락으로 구성하여 각 단락의 소제목을 중국어로 표기하였다. 전반부 3개 단락은 장형수가 옌쯔량의 사연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구성하여 독자의 관심을 점차 증폭시킨다. 후반부 2개 단락은 중국 문화대혁명과 5.18광주민주화운동에서 파생되었던 인간적 상실감을 부각시키고 있다.

[내용]

주인공 장형수는 지방 국립대학 교수로서 중국에 교환교수로 가 있던 중 미국인 교수의 아내인 옌쯔량을 알게 된다. 옌쯔량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소식이 끊겼던 아버지를 찾고 있다. 알고 보니 옌쯔량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1949년에 중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자 조국에 봉사하기 위해 중국으로 돌아왔지만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사상 개조, 반우파 투쟁의 과정에서 큰 핍박을 받았으며, 이 때문에 가족에게 되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우리들은 세월 속에 자신을 묻어 버렸다.'는 옌쯔량의 아버지가 남긴 말을 생각하면서 장형수는 대학 시절의 문학 동인들을 떠올린다. 국문학과 선배인 박영선, 의대생 최성호·김영희가 그들이다. 이 가운데 박영선은 학생운동권이었는데, 1980년 5.18 때 장형수·최성호·김영희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세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박영선을 외면하고 만다. 이후 김영희는 수녀가 되었고, 최성호는 의료과실의 책임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였으며, 간암이었던 박영선 또한 과로로 숨진다. 5.18을 거치면서 네 사람은 모두 스스로를 자책하며 살아왔다. 장형수·김영희·최성호는 박영선을 돕지 못했던 미안함으로 5.18을 기억했고, 박영선은 마지막 날 도청을 사수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으로 5.18을 기억했던 것이다. 장형수는 「정말 당신을 그리워합니다」라는 곡을 들으며 오월의 역사적 무게와 친구들을 다시 생각한다.

[특징]

「말을 알다」에서 각 단락의 소제목을 전반부 3개 단락은 의문문으로 하고 후반부 2개 단락은 평서문으로 하였는데, 이렇듯 소제목을 의문문과 평서문으로 배치한 것은 작품 제목인 '말을 알다'와 연계되어 작품의 주제를 강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말을 알다」의 공간인 광주와 중국의 상해는 단지 물리적인 공간만은 아니다. 광주와 상해는 마치 프랑스 혁명기의 런던과 파리처럼 역사적 의미망을 형성하고 있다. 「말을 알다」는 2개의 공간을 교차로 대비하여 병치함으로써 '역사적 비극이 초래한 휴머니즘의 상실'이라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말을 알다'는 그러므로 교환교수로 건너간 장형수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배우는 중국어 연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말을 나눔으로써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또 치유하고자 하는 형제애 혹은 인류애의 또 다른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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