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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93
한자 -漆石-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혜정

[정의]

광주광역시 남구 대촌동 칠석마을에서 전해오는 전통 민속놀이.

[개설]

고싸움놀이는 원래 광주광역시 남구[구 전라남도 광산군 대촌면] 칠석동 마을에서 정월 대보름 전후에 행해지던 민속놀이이다. 해방 이후 전승이 중단되었던 것을 당시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지춘상 교수가 발굴, 복원하였다. 1969년 제1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았으며, 1970년 7월 22일 국가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지춘상 교수의 고싸움 발굴]

동은(東隱) 지춘상(池春相)[1931~2009]은 전라남도 함평 출생으로, 1956년부터 1998년까지 전남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민속자료를 수집·발굴하였다. 1960년대부터 전통문화의 소중한 가치를 인식하고, 전남대학교 재직 40여 년 동안 민속학과 무형문화재 발전에 헌신적으로 이바지했다. 호남권은 물론 한국·일본·동아시아권 문화유산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한국의 민속학자 중 가장 방대한 현장 자료를 축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춘상이 수집한 현장 자료는 슬라이드 필름 5,000매, 일반 필름 20,000매, 인화한 사진 8,000매, 녹음테이프 500여 개, 릴 테이프 50개, 비디오테이프 200여 개에 달한다. 지춘상은 2009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도민속학 개설』, 『전남의 농요』, 『전남의 민요』 등 수많은 귀한 책과 논문을 남겼고, 민속학 분야의 후학 양성에 힘썼다. 또한, 남도민속학회를 설립하여 ‘남도민속’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지춘상 교수는 대학 재학 시절 우연히 들은 민요로 인해 민속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1. 2004년 한국민속학회 강연 자료 중

"제가 이 민속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정말로 우연한 기회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는 6.25사변 때입니다. 전쟁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전(終戰)된 후에 정말로 우리나라는 정신적인 공백기라고 할까요?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마침 농촌 출신이라서 이제 그 고향에 가다가 그때 논매는 소리와 그다음에 밭에서 한 아주머니가 흥글노래·신세타령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저는 가다가 그 자리에서 멈춰서 '무슨 노래를 저렇게 하고 있냐?', 그때가 대학 3학년 때입니다. 그래서 그때 바로 제가 돌아와서 그 노래 들은 것을 머리에 새기면서 '어떻게 보면 정말로 한국의 정신과 한은 저런 노래 속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시작입니다."

그가 민속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던 60년대는 근대화라는 깃발 아래 민속에 관한 관심도 없었고, 미신이라 치부하면서 버려 마땅한 것으로 취급하던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지춘상 교수는 버스를 타고, 녹음기와 카메라를 들고 조사하러 다녔다. 어느 땐가는 간첩으로 오인을 받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2. 2004년 한국민속학회 강연 자료 중

"또 대단히 어려운 것은 6. 25사변 직후이기 때문에 어떤 조사를 나가면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리고 '6.25사변 때 말을 잘못했다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것을 묻고 다니느냐?' 이런 얘기고 또 그다음에 민요를 하라고 하면 '먹고살기 편해야 소리도 부르는 것이지 무슨 소리를 하라고 그러느냐?', 또 상엿소리 한번 하라고 하면은 '사람 그렇게 많이 죽었는데 또 죽으라고 하는 소리냐?' 도저히 뭐 접근할 수가 없을 정도의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때 조사 가면 경찰서에서 반드시 순경들이 와서 옆에 있다거나, 또 조사를 가면은 지서에 가서 신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던가, 이런 그 어려운 여건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돌아다니고 조사한다는 그 자체가 어떻게 보면 대단히 지난(至難)한 그런 시절이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우리 민속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꾀해야 쓰겠다. 또 우리 민속의 수월성이라든가 남도 민속의 우수성의 실체를 이제 보여줌으로써 여기 주민들이 협조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을 조성해야 쓰겠다. 그렇게 생각에서…."

지춘상 교수가 발굴하고 되살려낸 대표적인 남도민속이 국가무형문화재 고싸움놀이[제33호]이다. 1940년을 마지막으로 단절된 고싸움놀이는 관련 기록이 없이 구술 자료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칠석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마을의 유래와 풍수를 조사했다. 1969년 그는 마침내 단절된 고싸움놀이를 재구성해서 제1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았다. 고싸움놀이가 지춘상에 의해 복원된 것이다. 그 상황은 다음 내용에서 살펴볼 수 있다.

3. 2004년 한국민속학회 강연 자료 중

"제가 솔직히 말해서 제일 처음에 시작한 것이 1969년에 '고싸움놀이'를 발굴해서 대구에 가서 대통령상을 탄 것입니다. 지금에 대해서 제가 여기 갖고 왔습니다만, 민속에 대해서 정말로 언론계에서라든가 우리 전통문화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만, 그때만 하더라도 여기에 제가 신문을 몇 개 가지고 왔습니다만, 이것은 『중앙일보』입니다. 제가 그때 고싸움으로 대통령상 탔을 때 이런 식으로 신문에서 전부 대대적으로 홍보를 해줬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문마다 이런 식으로 여기에다 써주고 특히, 『중앙일보』에는 임석재 선생이 해설까지도 해주고 말이죠. 이런 식이었고. 그래서 이제 이분들이 특히, 우리 전남 사람들이 민속에 관한 관심을 대단히 갖게 된 것에 대해서 저는 그때 감회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4. 『동아일보』 1986년 9월 4일 자 기사 중에서

"고싸움놀이는 1969년 제1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타기 전까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마을만의 민속놀이였다. 광산군(光山君) 공보실 관계자에 따르면, 옛날부터 계속되어 왔으나 해방을 전후로 인멸되다시피 했던 것을 전남대학교 지춘상 교수[민속학]가 발굴,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한 후 대표적인 우리나라의 민속놀이로 꼽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듬해 국가무형문화재 33호로 지정된 후에는 인간문화재로 이판동(李判同) 씨[1983년 사망]가 지정되는 등 전승에 활기를 띠게 되었고, 이인식(李仁植, 59), 장용술(張用述, 65) 씨 등이 인간문화재 후보로 보급에 힘쓰고 있다고 소개했다. 특히, 이번 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 고싸움놀이가 시연될 예정이어서 전수회관 건립은 더욱 큰 뜻이 있다고 고싸움놀이보존회 총무 이영재 씨는 말했다."

5. 『중앙일보』 1969년 10월 7일 자 기사 중에서

"이번 제1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우승하여 대통령상으로 우승기와 1백만 원의 상금을 탄 '고싸움'은 전남 광산군 대촌면 칠석리[옻돌마을]에 전승된 민속놀이이다. 대회에 처녀 출연하여 최고상을 단번에 타게 된 것은 아마도 이 고싸움이 처음일 것이다. 그만큼 이 놀이의 내용이 다채로웠고 연기며 연출 효과가 우수하였던 모양이다. 들은 바에 의하면, 옻돌마을을 비우다시피 온 부락의 남녀노소가 다 참가하였다고 한다. 오랫동안 전승해서 몸에 밴 놀이이기에 그 진미를 십분 발휘한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고싸움의 기원과 전래에 관한 문헌은 아무 데도 없다고 한다. 형성 과정도 별다른 기록도 구전도 없다고 한다. 그 마을에 고로의 말에 의하면, 그의 조부가 어렸을 때도 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로 보면 고싸움은 퍽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6. 『중앙일보』 1969년 10월 6일 자 기사 중

"대통령상의 고싸움놀이는 전남 광산군 대촌면 칠석리에서 정월 대보름에 온 부락민이 어울려 행하는 차전(車戰)의 일종. 부락민 240명이 두 패로 나누어 각기 도마뱀처럼 생긴 동아줄[길이 20m]을 메고 겨루는 이 놀이는 지난 20여 년간 중단되었던 것을 이번 경연대회를 계기로 재생한 것이다."

88서울올림픽에서 개막 행사의 메인 테마는 바로 고싸움이었다. 또한, 폐막식에서는 강강술래가 감동적인 그림을 만들어냈다. 한 나라의 전통문화가 그렇게 한 사람의 믿기지 않는 열정에 힘입어 복원되었다.

서남해안의 전통 놀이인 해남 강강술래 역시 지춘상 교수가 노랫말을 복원하고 가무를 재구성해서 1976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여 대통령상을 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진도씻김굿, 거문도 뱃노래, 가거도 멸치잡이 노래, 수많은 남도의 들노래들을 지춘상 교수는 우리 곁으로 되돌려 주었다. 지춘상 교수가 발굴한 주요 작품과 시상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싸움놀이' 발굴·지도, 제1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1969년]

'거문도 뱃노래' 발굴·지도, 제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개인상[1970년]

'장흥 보름줄다리기' 발굴·지도, 제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국무총리상[1970년]

'진도 들노래' 발굴·지도, 제1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국무총리상[1971년]

'나주 들노래' 발굴·지도, 제1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국무총리상[1974년]

'해남 강강술래' 발굴·지도, 제1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국무총리상[1975년], 제17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1976년]

'진도만가' 발굴·지도, 제1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문화공보부 장관상[1978년]

'거문도 술비소리' 발굴·지도, 제2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장려상[1980년]

'함평 농요' 발굴·지도, 제2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개인상[1981년]

'장산도 들노래' 발굴, 제23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국무총리상[1983년]

'담양 들노래' 발굴, 제26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문화공보부 장관상[1986년]

'고흥한적 들노래' 발굴, 제3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문화공보부 장관상[1990년]

'광산농악' 발굴·지도, 제3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문화공보부 장관상[1991년]

'광산 들노래' 발굴·지도, 제34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공로상[1994년]

'진도 닻배노래' 발굴, 제3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문화공보부 장관상[1995년]

'호남 우도농악 도잽이굿' 제3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공로상[1995년]

'광산 풀두레' 제38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공로상[1998년]

[복원된 고싸움놀이(1969년도)]

20여 년간 중단된 고싸움은 1969년에 복원되는데, 당시 복원된 내용이 전남대학교 학보사에 실려 있다. 이를 바탕으로 당시 복원된 고싸움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고 만들기

(1) 줄 드리기

정월 열흘경 상촌[상칠석, 우대미]과 하촌[하칠석, 아래대미]이 정월 대보름경에 고싸움['고'를 맞댄다고도 함]을 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지면 대표자들이 집마다 논 경작지 면적에 따라 볏짚을 거둔다. 볏짚이 모이면 상촌은 공회당 뜰에서, 하촌은 모정인 부용정 옆에서 줄 만들기를 시작한다.

먼저 볏짚을 왼손에 한 줌씩 쥐고 오른손을 갈퀴 모양 손가락을 펴서 볏짚 밑동아리에 붙어 있는 볏 잎을 훑어 낸다. 이 작업은 '고'를 곱게 만들기 위해서인데, 이것이 끝나면 줄 드리기에 알맞을 정도의 짚을 쥐고 그 머리를 매듭지어 묶음 다음 한 사람이 오른쪽 어깨 위에 걸치고 두 손을 잡는다. 그러면 세 사람이 달려들어 세 가닥으로 나누어 쥐고 오른쪽으로 비비 꼬면서 3합의 줄을 꼬아 간다.

줄이 드려짐에 따라 줄을 메고 있는 사람은 두 손으로 줄을 앞으로 당겨 간다. 줄의 굵기는 어른 팔뚝만큼이나 되는데, 길이가 20여m에 이르면 끝을 매듭지어 묶어 놓고 또 새 줄을 드려 간다. 이렇게 만든 줄을 또다시 3합으로 꼬아야 하는데, 이때는 사람의 어깨에 메고는 할 수 없으므로 문간의 대들보나 나뭇가지에 걸고 줄을 드려 간다. 먼저 줄 세 가닥의 끝을 합쳐 묶고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 5m 정도의 8합 줄을 드린 연후 이것을 대들보나 나뭇가지에 던져 걸치게 하고는 두세 명이 이 줄을 잡는다. 그러면 한 가닥의 줄에 두세 사람이 달려들어 오른쪽으로 틀면서 3합의 줄을 꼬아 간다. 이 과정을 '줄 드린다'라고 한다.

(2) 줄 도시기

앞에 드린 줄을 또다시 3합으로 꼬아야 하는데, 옛날에는 소가 끄는 수레바퀴에 묶고 바퀴를 돌려 튼 다음 꼬아 갔다고 하나, 오늘날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먼저 세 가닥의 줄을 마을 앞 큰길에 줄지어 늘어놓은 다음 맨 끝부분을 단단히 묶고는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 손으로 줄을 비벼 튼다. 줄이 어느 정도 꼬아졌으면 대여섯 명이 달려들어 머리로부터 줄을 꼬아 간다. 이때 줄을 단단히 꼬기 위해서 메로 다지면서 꼬아 간다. 이 과정을 '줄 도신다'라고 한다. 이 줄이 '고'를 만드는 밑줄이 된다.

(3) 곳대가리 만들기

줄 도시기가 끝나면 '고머리', 이 지방 사투리로 '곳대가리'를 만든다. 먼저 지름 3~4㎝ 정도의 통대를 한 속[20개]을 가져다가 땅바닥에 늘어놓은 다음 이를 메로 두들겨 쪼갠다. 이 작업은 '곳대가리' 속에 통대를 넣으면 타원형으로 휘어지지 않으므로 대[竹]의 힘을 빼자는 것이다. 다음은 줄 세 가닥을 모아 놓고 그 속에 통대 20여 개와 먼저 쪼갠 대를 고루 섞어 넣어 몇 군데를 묶는다.

이 줄을 높은 곳에 올려놓고 한쪽에서부터 팔뚝만 한 크기로 3합 줄로 친친 감아 간다. 이때 한 사람은 줄 위에 말을 타듯 걸터앉아 메로 감아 가는 줄을 단단하게 다진다. 만약 이때 메로 다지면서 단단하게 감지 않으면 곱게 감아지지도 않을 뿐 아니라, 단단하게 감아지지를 않는다. 이렇게 곳대가리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길이가 되면 땅 위에 내려놓고 이를 타원형으로 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속에 대가 들어 있으므로 쉽사리 휘어지지를 않는다. 그래서 큰 느티나무 밑동을 이용해서 한쪽부터 서서히 휘어간다. 타원형으로 휘어졌으면 이의 끝부분을 단단히 묶어 놓는다. 이 과정을 '곳대가리 만들기'라고 한다.

(4) '고 몸체' 만들기

'고'의 몸체를 '고 몸뚱이' 또는 동체(胴體)라고 한다.

몸체를 만드는 과정은 먼저 '고 몸체'에서 나온 세 가닥의 도신 줄을 반듯하게 늘어놓은 다음 그 속에 '지릿대'라고 하는 길이 10여m의 통나무를 넣고 다시 높은 곳에 올려놓은 다음 곳대가리를 만들 때의 과정과 같이 친친 감아 간다. 그런데 이 '고 몸체'를 좀 더 크게 만들기 위해서 짚이라든가 남은 줄을 속에 넣어 가면서 감아 간다. 이 몸체는 꼬리가 부분으로 갈수록 그 굵기가 줄어든다. 이 과정을 '고 몸체 만들기'라고 한다.

(5) 꼬리 줄 만들기

고 몸체가 다 만들어지면 이제 두 가닥의 꼬리 줄을 만든다.

'꼬리 줄'은 고 몸체에서 나온 세 가닥의 줄 가운데서 한 가닥의 줄은 잘라 버리고 두 가닥만을 풀어서 단단히 3합의 줄로 꼬아 간다. 그러나 너무 굵으면 잡아당기기가 불편하므로 적당한 크기로 만들어 가고 꼬리 부분으로 갈수록 가늘게 만들어 간다. 이 꼬리 줄의 길이는 대개 7~8m에 이른다.

(6) 곳대가리 세우기

꼬리 줄이 다 만들어지면 곳대가리를 45도 각도로 추켜세운다. 그리고 '고'가 서로 맞대어 부딪쳤을 때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굉갯대'라는 Y자형의 나무를 몸체에 들어 있는 지릿대와 연결해 묶는다. 곳대가리를 약 45도 각도로 세우면 Y자형의 굉갯대 머리를 곳대가리 앞부분 안쪽에다 대어 받치고 밑 부분은 지릿대에다 홈을 파고 그 속에 집어넣어 빠지지 않게 못질을 한다. 그러고는 밧줄로 위에서부터 밑으로 친친 감아 몸체에 단단히 묶는다. 이때 만약 굉갯대를 잘못 묶어 세우면 곧 '고'가 앞으로 넘어지므로 단단히 묶어야 한다.

(7) 가랫장 달기

'고'를 어깨에 메고 또 고를 부딪칠 때 치켜 밀기 위한 '가랫장'을 달아야 한다. 이 가랫장을 묶어 가는 과정은 먼저 '고'의 크기에 따라 일정한 길이와 크기 및 수 개의 통나무를 곱게 다듬은 다음 '고 몸체' 밑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한 다음 하나하나 묶어 간다. 묶을 때는 흔들리지 않게 하도록 메질을 해 가면서 꼼짝하지 않게 묶는다. 만약 이 가랫장이 움직이면 두 손으로 받치고 돌진할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없으므로 될 수 있으면 단단히 묶어야 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고'는 모두 만든 셈이다. 이 줄을 곱게 하려면 고 몸뚱이를 칼로 다듬기도 하고, 또 횃불로 나온 짚을 태워 보기 좋게 만드는 수도 있다.

2. 고싸움 방식

고싸움놀이는 음력 초열흘경부터 그 서전(序戰)이 시작된다. 대개 초여드레경이 되면 어린이들이 밖에서 놀다가 길이 5~6m[물론 때와 때에 따라 그 크기가 다르지만] 정도의 조그마한 '고'를 만들어 어깨에 멘 채 상대방 마을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승전가를 부르면서 호전한다. 이 광경을 본 상대방 어린이들이 약이 올라 당장 그보다 더 큰 '고'를 만들어서 호전하는 마을 앞을 돌아다니면서 시위를 벌인다. 그러다가 서로 맞부딪치면 시비를 벌이고 싸움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15, 16세 정도의 어린이들이 이에 합세하여 싸움이 벌어진다. 이때 이 광경을 보고 있던 20여 세의 청년들이 다시 합세하게 되고 드디어 길이 10여m 정도의 '고'를 만들어서 소규모의 고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때가 대개 음력으로 열사흘경이 되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싸움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간다. 그러면 상촌·하촌의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있는 장년층의 몇 사람이 모여 고싸움놀이를 하기로 하고 여러 가지 일을 협의한다. 여기에서 합의가 이루어지면 상촌·하촌은 대책을 마련하고 준비위원과 '줄패장'을 뽑는다. 여기서 뽑힌 준비위원들은 당장 행동을 개시하여 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짚을 걷고 또 산에 올라가 '고'를 만드는 데 쓰이는 나무를 베어 오는 등 그 준비를 서두른다. 이 재료 준비가 끝나면 즉시 '고'를 만들기 시작한다.

열엿샛날은 상촌·하촌 마을이 합동하여 마을 앞에서 '삼일(三日) 굿'을 하고는 각각 분리하여 자기 마을로 돌아가 고싸움 준비에 들어간다.

고싸움이 벌어지는 날 오후가 되면 상촌·하촌 마을 앞을, 서부는 동부, 즉 상촌 마을 앞을 돌아다니면서 시위를 벌이며 기세를 돋운다. 이때 행렬의 순서는 횃불을 켜 든 횃불잡이들이 앞에 서서 인도하며, 그 뒤에는 농기(農旗)와 영기(令旗)를 든 기수들이 뒤따르며, 그 뒤에 농악대가 따른다. 이 농악대의 뒤에 이제 '고'가 뒤따르는데 '고' 위에는 줄패장이 올라타고 영기를 흔들면서 '설 소리'를 하며 여타의 놀이꾼들은 '받는소리'를 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느릿한 가락의 노랫소리를 하면서 전의를 가다듬고는 싸움판이 벌어질 마을 앞 논바닥으로 들어선다. 이때 상대방의 '고'가 눈에 들어오면 전의는 충천하게 되고 노래조차 빠른 가락으로 급변한다.

'고'와 '고'가 서서히 정면을 향해서 접근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뒤로 물러서고, 또 앞으로 다가섰다가 뒤로 물러서면서 껑충거리기 시작한다. 이렇게 몇 번이고 '고'를 댔다 떼었다 하다가 '줄패장'이 "밀어라!" 하는 명령이 내리면 몇 번이고 '고'를 멘 사람들이 일제히 "와" 하고 함성을 지르면서 가랫장을 두 손으로 힘껏 뻗쳐 들고 돌진하여 상대방 '고'의 정면에 부딪힌다. 그러면 '고'는 미는 힘 때문에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고 첫째 번 가랫장과 둘째 번 가랫장은 '멜꾼'들의 손에서 떨어져 솟아오른다. 이때 줄패장들은 '고' 위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고' 밑으로 넘어뜨리려고 일대 접전을 벌인다. 농악대는 함성을 지르면서 농악기를 두들기고 횃불잡이와 기수들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횃불과 깃발을 흔들어 댄다.

이렇게 밀치기를 10여 분 하면 놀이꾼들의 팔 힘이 빠지고 또 자기 편에 불리하다 싶으면 줄패장은 재빨리 "빼라!" 하는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꼬리에 붙은 놀이꾼들이 날쌔게 '고'를 뒤로 잡아당겨 '고'와 '고'는 떨어져 나간다. '고'와 '고'가 떨어져 나가 어느 정도의 거리에 자리하게 되면 농악대는 '고'를 맴돌면서 악기를 두들기며 전의를 북돋워 준다. 그러면 굿을 보던 사람들까지도 흥분하기 시작하여 드디어 놀이꾼이 가세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광란과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어느 정도까지 휴식을 취하고 나면 줄패장은 또다시 "밀어라!" 하는 명령을 내린다. 이렇게 몇 번이고 부딪쳤다가 떨어지고 떨어졌다가 또다시 부딪쳐서 상대방의 '고'를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든지 짓눌러 땅에 닿게 하면 이기는 것이다. 그러나 필사적인 격렬한 싸움인지라 승부가 빨리 날 리 없다. 그래서 밤새도록 하기도 하고 또 며칠이 걸리기도 한다. 승부가 빨리 날 리 없고 또 승부가 났어도 진 쪽이 재도전해 오므로 승부 내기가 매우 힘들다. 만약 이겼을 때 이긴 쪽의 희열에서 오는 광란은 말할 나위 없고, '고'를 멘 채 승전가를 부르며 자기 마을을 휩쓸고 돌아다닌다. 그러면 부농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술과 닭죽을 내놓아 승리의 술판이 베풀어지고 저녁에는 농악기를 치며 밤샘한다.

이렇게 하여 그날의 '고싸움'은 끝난다. 그러나 그 이튿날 이제 진 편이 분통이 터져 전열을 재정비하고 재대전을 꾀하려고 '고'를 메고 이긴 쪽 마을 앞을 돌아다니면서 승전가를 부르고 자극적인 시위와 약을 올린다. 이 광경을 본 이긴 쪽의 청년들이 달려들어 시비를 걸고 그러다가 또다시 고싸움이 벌어진다. 이러기를 몇 번 하며 스무날까지 계속된다. 만약 이때까지도 승부가 나지 않았을 때는 양쪽 마을 합의로 2월 초하룻날 줄다리기로 최종 승부를 가리기도 한다.

[고싸움놀이 복원의 의의]

고싸움놀이는 장흥·강진·영암 등 전라남도 일대에서 정월 대보름을 전후로 했던 격렬한 단체 놀이이다. 칠석마을은 한 해 농사의 풍년과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협동과 단결심을 앙양하며 고싸움놀이를 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단절되었던 칠석마을의 고싸움놀이는 1960년대 후반 지춘상 교수의 노력과 마을 주민들의 도움으로 복원·재현되었다. 1969년에는 제1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아 전국적으로 고싸움놀이의 문화재적·민속학적 우수성과 가치를 널리 알렸다.

이후 고싸움놀이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전국의 각종 문화 행사에 참여, 시연하여 문화재적 가치를 알렸다. 특히,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와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개막식 후 공개 행사로 소개되어 세계인에게 한국인의 진취적 기상과 강한 패기를 널리 알리는 데 일조하였다. 지금도 칠석동의 대보름날에는 '고'와 '고'가 만나는 흥겨운 축제가 행해진다. 규모도 줄어들고 격렬함도 사라졌지만, 한 해의 평안과 안녕을 비는 마음은 여전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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