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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72
한자 無等山-氣像-瑞石臺-立石臺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경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5년12월16일 - '무등산 주상절리대' 천연기념물 제465호로 지정

[정의]

광주광역시 동구 용연동과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에 사이에 있는, 무등산의 기운을 담아 펼쳐진 주상절리.

[무등산의 기상을 담아 펼쳐진 주상절리]

서석대입석대광주광역시 동구 용연동과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에 있는 주상절리이다. 수직단애(垂直斷崖)는 무등산 정상에서 남서쪽 해발고도 1,060~1090m, 970~1,000m에 자리한다. 한랭기후 속 동결·융해작용의 반복으로 형성된 암주이다. 지형학에서는 빙하의 영향을 받아 기후기계적 풍화로 만들어진 주상절리로 풀이하고 있다. 지금도 얼음과 눈의 서릿발 작용으로 풍화가 진행되고 있다. 무등산에 분포하고 있는 여러 주상절리 중 서석대입석대는 그 모양과 규모에서 압권이다.

서석대 수직단애는 주능선과 남북 방향으로 직경 1~1.5m의 화산암 덩어리가 서사면에 무리지어 서 있다. 석영안산암질 응회암인 주상절리는 두 단으로 나눠볼 수 있으며, 규모는 1단의 경우 높이 8~12m, 길이 120m 정도이며, 2단은 높이 20~24m, 길이 150m쯤이다. 단애 뒷부분은 평탄하고, 앞쪽에서 뒤쪽으로 갈수록 조금 낮아진다. 윗부분은 4·5·6각형으로 다양하며, 거북등 모양과 닮았다. 주로 수직 주상절리로 되어 있고 드물게 수평절리도 보인다. 기둥 일부는 뒤틀려 기울어져 있어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화산암주의 좁은 수직절리 틈에는 점토질 토양이 끼여 철쭉과 단풍나무류가 자라고 있다. 돌기둥 벼랑 앞으로는 풍화와 침식으로 넘어진 거력(巨礫)[기반암에서 떨어져 나온 큰 암석 덩어리]들이 흩어져 쌓여 있다. 큰 암석의 크기는 대략 장축 3~4m, 단축 1~1.5m로 일정치 않으며, 분급 상태도 일정하지 않다. 큰 암석들 사이로 키 작은 낙엽활엽수가 자라고 있다.

입석대의 가장 큰 특징은 육각기둥의 거력들이 약 20m에 걸쳐 수직으로 솟아 있다는 점이다. 입석대에는 그 하부에 넘어진 거력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주변부에도 거력들이 나타나고 있다. 입석대 주변에는 알려지지 않은 주상절리 지형들이 산재해 있는데, 그 길이 드러나지 않아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입석대 수직단애는 주능선과 동서 방향으로 높이 19~20m, 길이 80~90m이며, 단애의 경사는 80~90° 안팎이다. 절리면의 너비는 0.5~4m이고, 5·6각형 모양의 주상절리대의 모습을 보인다. 입석대는 두 곳으로 나누어서 볼 수 있는데, 두 곳의 수직 경사는 약 90°를 유지하고 있다. 전망대 기준 남동쪽 단애 길이는 약 40m, 남서쪽 단애 길이는 50m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남동쪽 단애는 수직암괴가 손가락 마디와 닮은 모양이며, 각각의 암괴가 독립적으로 서 있는 특징을 보인다.

화산암 돌기둥은 직경 1.2~1.4m로 군집되어 있다. 암주 윗부분은 다각형 구조이고 평탄하며, 뒤로 갈수록 단이 조금씩 낮아진다. 수직절리 틈 0.5~1m 벌어진 곳에는 물이 고여 있고, 작은 관목과 부채손, 이끼들이 자라고 있다.

입석대 상단에는 다수의 바위 무리군이 있다. 이들 바위를 통칭 ‘거북바위’라고 하며, 크기는 높이 4~5m, 지름 10m 이내이다. 거북바위 내 암괴는 50~120cm이고, 5·6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20~30개가 뭉쳐져 있다. 암괴의 상부는 둥그런 모양을 하고 있다. 암괴가 둥근 이유는 오랜 기간 동안 지표면에 노출되면서 풍화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거북바위는 작은 주상절리대이며, 오랜 세월이 지나면 입석대와 같은 지형이 될 것이다. 입석대 북쪽에는 ‘승천암’이라는 노출암이 입석대장불재 일원 넓은 암괴원을 이루고 있다. 상부는 암괴의 노출이 심하고 겹겹이 쌓여 있는 반면, 하부로 가면서 암괴의 일부가 흙 속에 묻혀 있는 것이 많다. 암괴 주변은 입자가 고운 미립질의 토양이 덮여 있다.

2004년 광주광역시 『문화유적분포지도』에 “입석대는 동쪽 ‘입석’이라고 새겨져 있는 돌기둥이 있고, 이 돌기둥에서부터 서쪽 끝까지 약 40m에 걸쳐 높이가 10m 이상 되는 35~36개의 돌기둥이 줄지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옛사람들이 감탄한 절경]

서석대입석대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서석산이라고 하며, 하늘같이 높고 큰 것이 웅장하게 50여 리[약 20㎞]에 걸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위기둥이 서 있는 모양을 서석(瑞石)과 입석(立石)으로 한자로 달리 표현한 듯싶다. 서석대 수직절리는 ‘수정병풍(水晶屛風)’으로 문인들이 지칭하였다. 최남선의 『심춘순례』와 이은상의 『노산문선』에도 서석산이 보인다.

고경명은 1574년 서석대를 보고 『유서석록』에 “단애의 서쪽에 총석(叢石)이 즐비하게 섰는데 높이가 모두 백 척이 넘었다. 이른바 서석이라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라고 적었다. 양진영(1788~1860)은 “상봉으로부터 덩굴을 잡고 절벽을 따라 가다 보면 비탈 같은 곳이 나오는데 이름이 서석이다. 산이 이름을 얻게 된 까닭은 여기에 있다. 만 장이나 되는 바위가 우뚝 서 있고, 세 모서리가 날카롭게 난 모습을 이루 다 그려낼 수 없다”고 『유서석산기』에 기록하엿다. 조봉목(1805~1883)의 『유무등산기』에는 “서석은 그 왼편에 있다. 산 위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어마어마한 기분을 누를 수 없다. 아름다운 구름이 감싸고 있고, 푸른 이끼가 두르고 있어서 높이가 몇 백 장인지 알 수가 없었다. 드러난 바위의 기이함이나 철옹성 같은 견고한 모습은 아마 사람의 힘에 미칠 바가 아닐 것이다”고 쓴 글이 보인다.

송병선(1836~1905)은 서석대를 더 실감나게 『서석산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산의 오른쪽을 따라 돌아가니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보였다. 아래로는 총총하게 바위들이 늘어서 있다. 높이는 백여 자나 되고, 바위는 모두 곧게 모가 나 있다. 마치 먹줄과 자, 칼과 톱으로 만든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서석이다. 서로 포개져서 우뚝하여 마치 사람이 서 있는 것 같고, 병풍을 펼친 듯, 연꽃이 피어난 듯, 천상의 궁궐이 마주 보고 서 있는 듯, 그 수를 다 셀 수가 없었다. 어쩌면 신의 기술과 귀신의 솜씨로 바람과 천둥을 불러 이렇듯 기이한 모습을 만들어 놓은 것인가”

서석산서석대에 관한 한시(漢詩)로는 정지반의 「서석을 유람하며[遊瑞石]」, 박상의 「서석산을 유람한 시[遊瑞石山韻]」, 송순·임억령·김성원의 「서석산의 한가한 구름[瑞石閑雲]」, 이황·이동준의 「서석산의 맑은 구름[瑞石晴雲]」, 김인후의 「서석산의 맑은 기운[瑞石晴嵐]」, 김부륜·이명한·정약용의 「서석산에 오르다[登瑞石山]」, 양경지의 「서석에 올라[登瑞石]」, 이하곤의 「말 위에서 서석산을 바라보며[馬上望瑞石山]」, 유희경·고부민·신즙·정지준·송병선「서석산」, 정운희·조찬한·위백규·배현규의 「서석산을 유람하며[遊瑞石山]」, 나도규의 「서석을 구경하고 돌아와서[觀瑞石而歸]」, 송홍의 「서석산에 오르다[伴躋瑞石山]」, 김희수의 「서석상봉에 올라[登瑞石上峰]」, 정일섭의 「서석산을 유람하다[瑞石遊覽]」, 김창흡의 「서석상봉(瑞石上峰)」, 김운덕의 「서석산의 석대를 읊다[瑞石石臺吟]」와 「서석대에서[瑞石臺]」가 있다.

입석대에 관한 한시로는 고경명의 「유홍(兪泓)이 읊은 입석대 시에 차운하여 은스님에게 운을 드리다[次兪止叔詠立石贈恩上人韻]」, 윤증의 「입석대에서 노닐다가 중부의 시를 좇아서 차운하다[遊立石追次仲父韻]」, 김창흡의 「입석대에서[立石]」, 이해조의 「서석산 입석대에서[瑞石立石臺]」, 임상덕의 「임석대에 이르러[至立石]」, 구사맹의 「입석대를 오르다[登立石臺]」가 있다.

최남선의 『심춘순례』에 담긴 1925년 4월 12일 자 「성스러운 무등산 순례」 일부를 풀어보면 “전라남도 모범림 표지를 세운 곳에 다다르니 유명한 함품이재 마루턱이다. 왼쪽으로 등성이를 타고 올라가서 좋게 말하면 수정병풍을 둘러쳤다 하겠고, 진실로 말하면 해금강 한 귀퉁이를 떠왔다고 싶은 것이 ‘서석’이란 것이니, 무등산을 일명 ‘서석산’이라 하는 것은 이 대표적인 서석 외에도 크고 작은 무수한 서석이 여기저기 벌려 있기 때문이다. 서석이란 것은 요컨대 곧은결로 갈라진 바위들이 함께 모여 있는 것을 이름한 것이다. 다시 서쪽 기슭의 너덜겅, 곧 서덜을 한참 건너가다가 봉우리 끝에 무더기 돌이 수상스럽게 우뚝우뚝한 것을 보았다. 물을 것 없이 기이한 입석이 이미 그 한끝을 드러낸 것이다. 뫼 산(山) 자 모양으로 좌우에 이지러진 틈이 있고, 중간에 기둥이 우뚝 솟은 것 하나가 ‘입석의 완전한 표상은 내로라’하는 듯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다가서 앞으로 돌아가 보니 '기이하다마다. 과연 별종이군’하는 소리가 절로 입에서 나온다. 2층으로 높다랗게 석축한 단을 올라가면 오륙 모, 혹은 칠팔 모가 진, 천연으로 깎아 다듬은 굵은 돌기둥이 반원형으로 쭉 둘러서서 사람의 어안을 벙벙하게 만드는 것이 ‘무등산의 대표적인 경관인 입석대’란 것이다.”

[천연기념물 제465호 ‘무등산 주상절리대’로 다시 태어나다]

서석·입석대 107,800㎡는 ‘무등산 주상절리대’라는 이름으로 2005년 천연기념물 제465호가 되었다. 당시 문화재청은 “중생대 백악기 화산 활동의 산물로 용암이 냉각·수축하면서 생성된 무등산 주상절리대는 오랜 기간의 물리적 풍화로 인해 기둥·병풍 모양으로 형성돼 있어 경관이 수려하고 학술적 가치가 높은 점이 인정됐다고” 지정 이유를 밝혔다. 2018년 4월에는 유네스코 세계 지질공원에 지질명소로 정해졌다. 두 곳의 답사코스는 등반로를 따라서 중머리재에서 약 2㎞, 원효사에서 4㎞ 미만이다.

서석대 윗편에는 연원을 알 수 없는 ‘서석’ 음각 바위와 2010년 학정 이돈흥의 글씨가 새겨진 높이 150㎝, 폭 80㎝, 두께 30㎝, 무게 1.5톤의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앞에는 한자로 “서석대 1,100m”, 뒷면에는 “광주의 기상 이곳에서 발원되다”가 각인되어 있다.

입석대 수직단애 암괴에는 다양한 시기에 음각된 한자가 14건 있다. 과거 입석대를 오른 사람들의 낙서 또는 금석문이라고 할 수 있다. 1883~1885년 동복현감 유달준에 근거한 「복주수유달준(福州守兪達濬)」을 비롯하여 「유재천자완종극종광종(劉載天子完鍾克鍾光鍾)」’, 1876~1877년 나주우영장을 지낸 신림에 따른 「우영장신림(右營將申林)」, 1874년 호남좌도 암행어사 여규익에 관한 「호좌어사여규익(湖左御使呂圭益)」, 1868년 암행어사 정직조가 지나갔다는 「숭정기원사무진맹하암행어사정직조과차(崇禎紀元四戊辰孟夏暗行御史鄭稷朝過此)」, 1761년 봄 박지원 행적인 「박지원신사춘(朴志源辛巳春)」, 1760년 가을 관찰사 박도원 관련 「관찰사박도원경진추(觀察使朴道遠庚辰秋)」, 1874년 경시관 한장석 등정 건 「경시관한장석(京試官韓章錫)」, 1870년 가을 광주목사 신석유 건 「지주신석유경오추(知州申錫遊庚午秋)」, 광주부호 지응현(1867~1957) 관한 「지응현(池應鉉)」, 1832~1833년 재임한 전라도 관찰사 이규현과 지인 추정 김중식 건 「관찰사이규현김중식(觀察使李奎鉉金中植)」, 1757년 11월 독운어사 홍양한이 쓰고, 경양찰방 낙석로와 함께 놀은 「숭정삼정축중동독운어사홍양한서경양찰방남석로동유(崇禎三丁丑中冬督運御史洪良漢書景陽察訪南碩老同遊)」, 1858년 중앙절에 광주목사 이태현과 나주목사 서유상 건 「본주목이태현나주목서유상구월구일(本州牧李台鉉羅州牧徐有象九月九日)」, 「최윤항(崔崙恒)」이다.

입석대 전면에는 다소 평평한 면이 20×10m를 유지하고 있다. 이 평평한 면을 유지하기 위해 작은 암석으로 경사벽을 쌓은 축성의 흔적들이 나타나며, 그 높이는 위치에 따라 다르지만 최대 3.5m에 이른다. 이곳은 과거 절터로 사용된 것으로 판단되며, 입석대 평탄면 위에 과거에 사용된 기와의 흔적들과 묘지 1기가 관찰된다.

1988년 향토문화개발협의회에서 펴낸 『무등산』에 보면 입석암지(立石庵址) 건물터에 대해 “규모는 길이 20m, 폭 13m이며 방향은 약간 동쪽으로 기운 남향이다. 축대는 주변의 석재를 이용한 거친돌 허튼층쌓기를 보이며, 축대의 서측면이 동측면에 비해 월등히 높아 최고 4.6m의 높이를 보인다. 건물의 규모는 축대의 중앙에 노출된 초석으로 보아 정면 3칸, 측면 2칸 정도로 생각된다. 샘은 동쪽과 서쪽 두 곳에 있는데, 서쪽 샘터 주변에는 자연석에 조각한 맷돌 편이 1점 남아 있다. 주변에서 수습된 유물로는 와편[암막새·문양]과 토기편[격자문] 및 자기편이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현재 서석대에는 등반객과 사진 촬영자의 안전을 위해 나무테크가 설치되어 있다. 광주입석로타리클럽에서 세운 입석대 표지석에는 해발고도를 1,017m로 새겨져 있다. 광주광역시에는 서석대의 이름을 딴 광주서석초등학교와 1970년대 남화토건에서 화정동에 설립한 광주서석중학교광주서석고등학교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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