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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59
한자 古代文化-新昌洞遺蹟
이칭/별칭 광주 신창동 유적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시대 선사/철기,고대/초기 국가 시대
집필자 주은진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에 있는 초기 철기시대부터 원삼국시대의 복합농경유적.

[개설]

신창동유적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에 있는 초기 철기시대부터 원삼국시대의 복합농경유적으로 국가사적 375호이다. 영산강변에 낮게 솟은 삼각산[해발 98.1m]에서 영산강의 서안을 따라 남동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의 끝자락 일대에 자리한다.

[발굴 조사]

신창동유적은 1960년 향토사가인 양회채(梁會采)가 도로 옆 단애면에 노출된 독널[甕棺]을 발견·신고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963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에서 발굴 조사에 착수하여 총 53기의 독널무덤[甕棺墓]을 발굴함으로써 그 실체가 드러났다. 그 뒤 국도 제1호선 도로개량공사가 진행되면서 국립광주박물관이 1992년에 긴급 조사를 시행한 이래 현재까지 총 14차례의 발굴 조사가 시행되었다.

유적의 지형은 크게 해발 30m 정도인 4개의 낮은 구릉지대와 그 사이 3개의 작은 곡간지대, 그리고 영산강변에 인접하여 생성된 곡간충적지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서쪽의 구릉에서는 독널무덤, 두 번째 구릉에서는 토기가마·도랑·밭, 두 번째와 세 번째 구릉 사이에는 저습지 유적이 형성되어 있다. 네 번째 구릉의 동쪽은 비교적 급경사를 이루며 영산강과 만나는데, 이곳에서 도랑이 조사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와 네 번째 구릉에는 송국리형 집자리와 뒤이은 시기의 마한계 방형 집자리가 확인되었다. 이처럼 구릉지대와 비옥한 충적대지에 형성된 신창동유적은 벼농사를 기반으로 하는 생산과 생활, 그리고 무덤의 실상을 알려 주는 거대한 복합농경유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다양한 유기물이 조사된 저습지 유적으로 학술·문화적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경(耕)과 직(織)의 공동체 문화를 이루다]

고대 동아시아 농경사회를 형성하는 기본적인 관념은 ‘남경여직(男耕女織)’의 관념이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韓) 조에도 “마한은 서쪽에 있다. 그 백성들은 토착생활을 하며, 씨뿌리며 농사를 지으며, 누에를 쳐서 면포를 지을 줄 안다.[馬韓在西其民土著種植知蠶桑作綿布]”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리고 신창동유적지에서 벼 껍질과 천 조각이 발굴되면서 이곳에 논밭을 일구고[耕] 길쌈하는[織] 공동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 농경문화

신창동유적에서 확인된 155㎝ 두께에 달하는 벼 껍질 압착층은 주목할 만하다. 신창동 벼껍질 압착층은 동아시아 벼농사의 기원지로 알려진 중국 저장성[浙江省]의 하모도[河姆渡] 유적지의 벼 퇴적층[평균 0.2~0.5m, 최대 1m]보다 훨씬 두껍다. 영산강과 맞닿은 신창동유적에는 저습지와 충적대지가 전개되어 논의 개간에 유리하고 벼의 재배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조사에서 벼를 재배한 논의 토층이 확인되었으며, 벼를 재배한 밭이 최초로 확인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밭벼[육도(陸稻)] 재배의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한다. 이를 통해 논벼[수도(水稻)]와 함께 밭벼의 생산 기반이 갖춰진 우리나라 최초의 유적임이 증명되었다.

벼를 재배한 밭과 논의 존재와 함께 괭이와 따비 등 굴지구(掘地具), 낫·절구공이 등 다양한 목제 농구도 발굴되었다. 농기구는 농업 생산에 사용되는 기본적인 도구로, 농경이 시작된 신석기시대 이래로 다양한 종류를 이루며 발전하였다. 신창동 발굴 목제 농구는 초기 철기시대의 생활상을 보여 주는 한편, 당시의 농경 기술을 복원하는 자료이다.

더하여 저습지 유적에서는 벼뿐만 아니라, 조, 밀, 들깨 또는 차조기, 오이, 삼 등이 확인됐다. 또한, 물을 매개로 하는 논의 생태학적 측면을 살펴본다면 논물고기잡이를 떠올릴 수 있다. 논물고기잡이는 우리나라의 농촌에서 전통적으로 행해졌던 것이고, 신창동에서 발굴된 그물추·통발 등의 유물이 신창동에서 행해진 논물고기잡이를 뒷받침한다.

2. 길쌈

신석기 이래 농업과 목축업이 발달하면서 인류는 더는 풀잎과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지 않게 되었다. 농업이 발달하면서 삼나무 같은 식물의 껍질로부터, 그리고 양잠을 통해 누에고치로부터 실을 뽑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석기시대의 직물 자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토기에 찍힌 자국이나 가락바퀴가 전부였다.

실제 천 조각이 확인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신창동유적이 최초이다. 두 점의 직물로 한 점은 마직물이고, 다른 한 점은 비단인 곡(穀)이다. 현재까지 조사된 직물 자료 중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오래된 것이다. 천 조각과 더불어 베틀의 부속구인 바디[緯打具]도 출토되었다. 바디는 직물을 촘촘하게 짜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로 베 짜는 기술이 발달했음을 보여 준다. 신창동 출토 바디는 선사·고대의 유일한 것으로 이 시기 베틀의 구조를 밝혀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 외에도 가락바퀴, 실감개도 함께 발견되었으며 삼베의 재료인 삼씨도 확인되었다.

3. 하늘에 풍년과 번영을 기원하다

“해마다 5월이면 파종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술을 마시기를 밤낮으로 계속한다. 춤은 수십 인이 함께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가 치켜 섰다가 하면서 손발로는 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가락이 마치 탁무(鐸舞)와 같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면 또 이와 같이 한다. 귀신을 믿고 국읍에 한 사람씩을 받들어 천신의 제사를 주재토록 했는데 이를 천군이라 부른다. 각국에는 별읍이 있는데 소도(蘇塗)라 부른다. 방울과 북이 매달린 큰 나무를 세우고 귀신을 섬긴다. 그 가운데로 도망 오는 사람은 모두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도적질을 좋아하게 되었다. 소도를 세운 뜻은 불교[부도(浮屠)]와 같으나 행하는 바의 좋고 나쁜 점이 다르다.[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群聚歌舞 飲酒晝夜無休 其舞 數十人俱起相隨 踏地低昂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信鬼神 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木 縣鈴鼓 事鬼神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好作賊 其立蘇塗之義 有似浮屠 而所行善惡有異]”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

농작물의 풍요로운 수확과 수확물에 대한 감사, 그리고 집단의 번영을 위해 고대인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농경의례를 행하였다. 농경의례는 농사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태양·바람·비 등의 자연현상과 곡령신·지신 등의 신에 대한 제사의례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농사일에는 파종에서 수확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의 공동 작업이 필요했으므로 농경의례는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통합하는 주요 수단으로도 기능하였다.

신창동유적의 농경의례와 관련된 유물로는 새모양목제품[鳥形木製品]과 바람개비문양칠기[巴文漆器], 점뼈[卜骨], 소형토제품 등이 있다. 새는 하늘과 땅을 자유로이 오간다는 점에서 신의 전령 역할을 수행하며, 그 자체로 태양신이 육화(肉化)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일찍이 농경사회에서는 태양의 움직임에 따른 일조량·강수량·기온 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새가 지닌 역할은 특별하다고 볼 수 있다. 신창동유적에서 출토된 두 점의 새모양 목제품 중 하나는 긴 막대기와의 결합을 위한 결합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솟대로 사용되었고, 결합구멍이 없는 것은 저습지 주변에서 벼의 수확이나 가공 등과 관련된 수변의례(水邊儀禮)가 행해질 때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바람개비문양칠기는 앞면 중앙에 회전하는 바람개비 문양, 가장자리에는 태양 빛 문양과 유사한 톱니날 문양을 배치한 목제품이다. 점뼈는 뼈에 구멍을 뚫거나 불에 달군 도구로 지져서 생긴 흔적을 보고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는 도구이다. 소형토제품으로는 굽다리접시, 발형토기, 접시, 시루, 뚜껑, 항아리, 국자 등의 식기류와 멧돼지 모양 토제품, 굽은옥 및 구슬을 본뜬 모양이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소형토제품이 출토되는 유적의 성격, 출토 위치, 점뼈와 함께 출토되는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의례 행위 중 실물을 대신하여 신에 공헌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의례의 현장에서 신을 부르고 의례 참여자를 고무시키며 장단을 맞추는 역할을 했던 악기도 발굴되었다. 신창동의 대표적인 출토품인 현악기(絃樂器)는 우리나라 현존 최고의 목제 현악기이다. 현고정부와 탄음부, 현미부로 구분되며 출토된 현악기의 상태를 근거로 복원한 결과 줄의 숫자는 10현으로 밝혀졌다. 북[鼓]은 바닥면이 좁고 아가리가 넓은 대접과 비슷한 형태의 목기로 겉면에 옻칠이 되어 있다. 아가리를 따라 가죽을 덮고 몸통에 난 구멍을 통해 가죽을 고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박자를 맞출 때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찰음악기(擦音樂器)도 발견되었다. 긴 나무 막대의 한쪽 부분은 손잡이며, 다른 쪽은 여러 개의 홈이 파여 있다.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나무로 만든 마찰봉을 문질러 소리를 내는 악기이다.

[복합생활단지를 형성하다]

신창동의 비옥한 충적대지는 사람들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했고, 그에 따라 신창동 사람들은 농경문화를 영위하며 마을을 이루어 나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창동유적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농경지와 주거 건물들이 이를 보여 준다. 게다가 가장 서쪽 구릉에는 독널무덤이 밀집된 것으로 보아 신창동 일대는 농경지와 집자리, 묘지가 공존하는 복합생활단지라고 할 수 있다.

1. 가옥

신창동 사람들이 어떠한 모양의 집을 짓고 살았는지는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유구의 형태로 미루어볼 때 움집과 고상 가옥의 두 형태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저습지 주변에 절반가량 남아 있는 평면 원형의 송국리형 집자리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시기 다른 유적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땅을 파고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지붕의 틀을 만든 다음 풀로 지붕을 덮어 움집을 완성했을 것이다. 이것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 “지붕을 풀로 덮은 흙집에 사는데, 형상이 마치 무덤 같다.[居處作草屋土室 形如塚]”는 기록에 보이는 형태의 집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저습지 인근에서 직경 22㎝ 내외의 참나무 기둥이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것이 확인됐고, 문짝과 건축부재들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를 통해 기둥을 세우고 바닥면을 지면보다 높게 만들어 사다리를 통해 출입하는 고상식 가옥(高床式 家屋)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상가옥은 지면에서 떨어져 있어 습기를 방지하고 동물의 피해를 예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일반적인 집이라기보다는 특수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다. 신창동에서 벼껍질을 비롯하여 대규모 농경을 보여 주는 자료가 확인되었기 때문에 고상가옥은 고구려의 부경(桴京)처럼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였다고 볼 수 있다. 또 기둥 주변에서 다량의 도끼밥과 같은 목재 가공의 부산물이 확인되는 것으로 볼 때, 공방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2. 무덤

신창동유적의 무덤은 저습지 유적에서 북서쪽으로 300m가량 떨어진 능선에 분포하고 있으며, 1963년도 조사에서 독널무덤 53기가 확인되었고, 2002년 국립광주박물관의 6차 신창동유적 발굴 조사에 따라 신창동식 독널 1기가 추가로 발굴되었다. 독널의 크기는 대체로 30~50㎝이고, 1개로 된 단옹식(單甕式)과 3개로 된 삼옹식(三甕式) 각 1기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합구식으로 횡치(橫置)된 이른바 신창동식 독널이다. 대체로 2개 이상의 소형독널을 사용하여 무덤을 조성한 점에서 일찍 사망한 유아나 소아를 매장한 것으로 판단된다. 신창동유적은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현재까지 발굴된 독널무덤 54기는 소아나 유아를 매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독널무덤이 분포된 지역과 다른 곳에 신창동 사람들의 무덤이 조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3. 다양한 생활용품

신창동 사람들은 대규모 농경과 함께 다양한 생산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농기구, 그릇, 악기, 무기 등 다양한 목기를 만들었고 상대적으로 높은 기술력을 요구하는 칠제품도 생산하였다. 신창동유적에는 버드나무속, 자작나무속, 뽕나무속, 상수리나무, 벚나무 등 다양한 온대림 활엽수종이 확인되었는데, 목기의 제작 과정은 만들려는 기물에 적합한 나무를 선정하고 벌채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농기구나 수레바퀴와 같은 거친 작업에 사용되는 기물을 만들 때는 단단한 참나무를 사용하였고, 악기를 만들 때는 음을 잘 전달하는 버드나무와 오동나무를 사용하였다. 이를 통해 신창동 사람들이 나무의 성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용도에 맞는 적절한 나무를 선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농업기술의 발달은 농기구의 발달과 궤를 같이한다. 신창동에서 출토된 괭이·따비·낫자루·절구공이 등의 농기구는 초기 철기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한편, 당시의 농경 기술을 복원하는 자료이다. 그 가운데 쌍날따비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농경문청동기에 묘사된 것과 같은 형태로 출토된 최초의 실물이다.

신창동유적에서 출토된 식기는 토기와 목기, 칠기로 나눌 수 있다. 그 구성은 굽다리접시, 바리, 대접, 접시, 사발 등 다양하고, 재질에 상관없이 비슷하였다. 그러나 구성은 비슷할지라도 재질과 만드는 방법에 따라 사용 목적을 구분했던 것 같다. 일반적인 식기는 토기와 목기로 제작되었지만 고급스러운 식기는 칠기로 만들었다. 칠기는 옻나무 수액을 채취한 뒤 정제하여 기물에 칠한 것으로 제작 과정이 복잡하여 높은 기술력이 필요하다. 즉 칠기는 의례용 혹은 신분이 높은 계층을 위한 고급식기였을 가능성이 크다. 완성된 칠기 유물과 더불어 칠기의 제작과 관련된 칠용기와 나무 주걱이 우리나라 최초로 출토되면서, 2,000년 전 신창동에 고도의 칠기 제작 기술을 가진 생산집단이 있었음을 상상하게 한다.

또한, 한국식 동검 모양의 목검과 다양한 검형 목제품이 신창동에서 출토되어, 신창동에서 목제 무기류 제작이 광범위하게 진행됐음을 보여 준다. 그 밖에 신창동 사람들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 유물로는 지름 160㎝로 복원되는 수레바퀴와 수레부속구, 불을 일으키는 데 사용한 발화구, 불을 옮기거나 등불 등으로 사용된 관솔, 부채자루·귀장식품·고깔·유리구슬 등의 장식품과 몸을 치장하는 데 사용된 빗, 가죽신을 만드는 데 쓰인 신발골, 일상생활에 사용된 빗자루·자리·끈·소쿠리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수레는 마차로 판단되며 이 지역에 수장급 유력자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 신분적 상징물이다. 바퀴통, 바큇살, 가로걸이대 등의 수레부속구는 낙랑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함께 출토된 철경부동촉, 낙랑계 토기 등과 함께 서북한 지역인 낙랑과 영산강 유역의 교류 관계를 잘 보여 준다.

[신창동 유적이 남기는 것]

신창동유적은 기원전 1세기대 전후의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한 유적지로서 주거와 무덤, 그리고 생산과 생활을 알려 주는 복합농경유적이다. 신창동 출토 유물 가운데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거나 최초로 발견된 유물이 있어 학술·문화적인 중요성을 인정받았고,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공백을 일부 메울 수 있는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따라서 신창동유적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지속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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