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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54
한자 元曉-元曉寺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최원종

[정의]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846에 자리한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찰.

[개설]

무등산의 북쪽 기슭의 원효계곡에 있는 원효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원효사는 신라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연원]

1847년(헌종 13)에 작성된 「원효암중건기(元曉庵重建記)」에는 원효대사가 산자수려한 곳에 작은 암자를 지어 기거하였다고 하여 사명을 원효암이라 지었고, 신라 지증왕~법흥왕 연간에 창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원효대사의 생몰연대가 617년~686년(신라 진평왕 39년~신문왕 6년)으로 지증~법흥왕의 재위 기간과는 차이가 있어, 신라 지증~법흥왕대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는 것은 기록으로 보아 맞지 않는다.

신라 지증왕[재위 500~514]과 법흥왕[재위 514~540], 양대에 이름 모를 조그만 암자로 세워져 있다가, 훗날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머물면서 수행정진을 하였고 대사의 덕을 추모하여 개창조로 모시고 원효암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1980년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는데 그 결과 신라 말기에 작은 암자로 창건되었고 그 뒤 고려 충숙왕 대[1314~1339]에 중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명종 때 문정왕후가 섭정하면서 불교가 진흥하자 원효사에도 승려들이 모여 수행하였는데, 후일 휴정 서산대사의 제자이자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었던 승병장 기허 영규(靈圭)가 이곳에서 수도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사찰이 모두 불타 소실되었던 것을 1609년(광해군 1)에 석경이 중창하고, 1636년(인조 16) 신원이 중수한 후 1637년(인조 15) 다시 옥견이 32불을 봉안하였다. 1789년 회운대사(會雲大師)가 법당을 중수하였고, 1831년(순조 31)에는 회운대사의 제자인 원담(圓潭)이 의관(議寬)과 함께 원효사를 중수하고 단청불사를 하였고, 1847년(헌종 13)에는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승려 함명 태선(涵溟 太先)[1824~1902]이 지은 「무진주무등산원효암주수상량문(武珍州無等山元曉菴重修上樑文)」에 의하면 1894년 학산대사(鶴傘大師)가 관청에 호소하여 재력을 시주받고 고을 유지들의 도움으로 사찰을 다시 중건하였다고 한다. 1925년에 남도 지방을 순례하고 쓴 최남선의 『심춘순례(尋春巡禮)』에 당시 원효사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대웅전과 나한전, 명부전, 선방, 칠성각 등의 전각과 원효, 청허(淸虛) 등의 탱화를 걸고 있는 영자전(影子殿)의 모습을 그리고 있어 당시 원효사가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1927년 원담대사(圓潭大師)가 다시 중수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해 다시 사찰이 전소되었다가, 1980년 승려 법타(法陀)가 대웅전 요사채 명부전을 신축 복원하고, 칠성각을 보수하였다. 1992년 승려 현지(玄旨)에 의해 성산각, 개산조당, 요사, 종각, 누각 등의 건물을 세워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건축]

사찰은 원효계곡 무등산 집단시설 지구로 가는 길목에서 주차장 오른편 경사로에 있는 일주문을 지나 부도군을 오른쪽으로 하고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마주할 수 있다. 입구에는 2층으로 원효루가 있어 그 밑의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정면에 대웅전이 있다.

원효루는 이전에는 회암루로 불렸으나 지금의 원효사 주지인 승려 해청이 원효루로 이름을 바꾸었고, ‘무등제일 원효루’라는 한글로 된 현판을 내걸었다. 원효루에 올라 무등산을 바라보면 정면 왼편에는 윤필봉과 투구봉이, 오른편에는 의상봉이 자리하고 있고 의상봉 뒤로 시선을 돌리면 정상 서석대까지 바라볼 수 있다. 원효사 앞에 의상봉이 있는데 신라의 두 고승인 의상과 원효가 백제의 땅에 와서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형국이다.

경내에 들어서면 정면 한 단 위에 대웅전(大雄殿)이 자리하고 있고, 정면에서 바라볼 때 대웅전 왼편에 성산각(星山閣)이 있고 오른편에는 약사전(藥師殿)이 있다.

한 단 밑 뜰에는 대웅전을 정면으로 보아 왼편에 명부전(冥府殿)과 원효전(元曉殿)이 있으며, 오른편에는 무등선원(無等禪院)과 그 뒤로 요사채가 있다. 대웅전 앞에는 감로정(甘露井)이라는 사찰의 수각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은 1980년에 새로 신축한 건물로 안에는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의 삼존불을 모셨고, 아미타후불탱과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은 1.5m 정도의 축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1980년 신축할 당시 정지작업 도중 청동불상 등의 유물이 노출되자 당시 원효사의 주지인 법타 스님이 공사를 중지하였고, 국립광주박물관에서 긴급히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청동불두, 금동불상, 쌍룡문 청동거울, 연꽃무늬 수키와, 금박을 입힌 토제 소조불, 원효사명 기와 등 140여 점이 출토되어 원효사의 규모와 천불전(千佛殿)의 존재, 창건과 중수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대웅전 오른편에 있는 약사전은 1993년에 조성되었는데, 약사여래불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夾侍)하고 있고 뒤편으로는 2009년에 조성된 약사여래불 탱화가 있다. 대웅전 왼편의 성산각은 삼성각(三聖閣)이라고도 하는데 1995년에 새로이 조성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으로 된 맞배지붕 건축물이다. 막돌로 된 추춧돌 위에 정면에는 원형의 기둥을 세웠고 측면에는 사각형의 기둥을 세웠다. 성산각 안에는 독성과 칠성, 산신을 모셨다.

대웅전과 약사전, 성산각 보단 한 단 아래 뜰에는 원효전, 명부전, 무등선원과 감로정이 자리하고 있다. 원효전은 이전에 개산조당(開山祖堂)이었는데 원효전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한글로 된 편액이 걸려 있다. 1990년에 새로 지어진 원효전 안에는 원효국사의 진영(眞影)이 세 가지 형태로, 각각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조성되어 있다. 원효전 안에는 동종이 하나 걸려 있는데, 1710년 담양의 추월산 만수사에 조성된 “원효사소장만수사범종”이다. 담양에서 조성된 범종이 어떤 연유로 지금의 원효사에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원효전은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5로 지정되어 있다. 원효전의 양 측면과 뒷면에는 원효대사의 탄생에서 출가, 수행, 입적을 보여 주는 총 14점의 벽화가 그려져 있어 원효대사의 일대기를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원효전과 나란히 있는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명부시왕을 모시고 있으며, 천도제와 사심구재 등에 사용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건축물로 1982년에 건축되었으며, 1990년 지장탱화를 봉안하였다.

원효전과 명부전의 맞은편에는 무등선원(無等禪院)이 있고, 그 뒤로 요사채가 이어져 있다. 무등선원은 정면 5칸, 좌측면이 2칸, 우측면이 3칸으로 되어있으며 우측 지붕이 ‘ㄱ’자 형태로 꺾여 있는 팔작지붕의 건축물로 원효사의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본당에서 오른편으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사자암은 법당과 두 동의 숙소 건물로 되어있는데, 템플스테이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문화재]

많은 한국의 사찰이 그러하듯이 원효사도 정유재란과 6.25전쟁 등의 화재로 신라부터 이어 온 천년고찰이 모두 불에 타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그러나 부도와 동종, 탱화 등 남아 있는 문화재들이 있어 원효사의 역사를 알려 주고 있다.

현재 원효사에 남아 있는 문화재는 원효사동부도[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 원효사출토유물[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 원효사소장만수사범종[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5호]과 근대 서양화가인 오지호의 아미타 화상도, 원효대사부도탑, 원담화상부도탑, 회운당부도, 진성당부도, 응담화상기념탑, 원효사석조지장보살입상 등이 있다. 그리고 1954년 대웅전 중수 때 주춧돌 밑에서 발견된 금동비로자나불상이 있었으나, 대웅전에서 보관한 뒤 개인이 소장하다 광주시립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였고, 이후 1974년 도난당해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된 ‘원효사동부도’는 전체적으로 팔각원당형 형식으로 탑의 몸체나 지붕돌을 모두 갖추고 있다. 부도를 받치고 있는 하대석은 4각형의 지대석 위에 팔각형으로 된 연꽃잎이 아래를 향하고 있는 복련대(伏蓮臺)로 나뉘는데 4각형의 지대석 내 모서리에는 4마리의 사자상을 조각하였다. 중대석은 팔각형으로 4면에는 꽃무늬를 남은 4개 면에는 용과 사자를 조각하였고, 상대석은 모서리에 연꽃을 새겨넣었는데 너무 얕아서 형식적으로 표현한 느낌이다. 길쭉한 형태의 탑신부는 팔각 형태로 1면에는 위패를 닮은 장식을 새겨 넣었으나 누구의 부도인지를 알려 주는 명문은 새기지 않았다.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원효사출토유물’은 1980년 원효사 대웅전 신축하던 중 발견된 것으로 백여 점이 넘게 발굴되었지만, 그중에서 불상 12점, 소조불두 18점, 청동거울 2점 등 총 32점을 문화재로 등록하였다.

[현황]

금동이나 청동 불상은 부식 상태가 심하여 광배나 받침대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고, 시기는 통일 신라에서 조선 시대까지 다양하게 나오고 있어 창건 이후 많은 수의 중창 불사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중 약사여래 입상을 제외하고 금동불상은 모두 불상 내부가 비어 있는 중공식으로 주조된 것으로 제작 기법을 보아 9세기 이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소조불두는 대부분 진흙으로 만들어졌으며, 고려 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발견된 불두와 조각들을 모아 복원한 결과 대부분 불상들이 약 27㎝가량의 크기를 가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깨어진 파편이지만 많은 불두 조각들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원효사에 천불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동거울 2점 중 2마리 용이 새겨진 거울은 조각이 섬세하고 정교하다. 중심에는 2겹으로 된 연꽃을 새겼고, 그 밖으로 2마리의 용을, 외곽에는 구름무늬를 새겼다. 가운데 있는 2마리용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꼬리를 물고 있는 모습이며, 여의주로 보이는 2개의 구슬이 용의 머리 부분 앞에 돋아나게 새겼다. 또 다른 백색의 거울은 무늬가 없으며 별 특징이 없다. 이 2점의 거울은 고려 시대 공예 조각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된 ‘원효사소장만수사범종’은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전체 높이가 86㎝, 지름 63㎝, 몸통 73㎝로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종을 거는 용뉴 부분에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겨 넣었는데 각기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으며, 두 마리의 용이 만나는 상단부에는 불꽃에 둘러싸인 여의주가 장식되어 있다.

유곽 하단에는 2개의 명문이 있는데 하나는 ‘강희사십구년 경인사월일 추월산 만수사 대종주성야(康熙四十九年庚寅四月日秋月山萬壽寺大鐘鑄成也)’라는 명문으로, 이 범종이 1710년(숙종 36) 전라도 담양에 있는 추월산의 만수사에서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범종의 특성을 보여 주는 것으로 제작처와 제작 시기를 확인할 수 있어 조선 후기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송광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원효사 아미타회상도는 대표적인 근대 화가로 꼽히는 오지호가 1954년 그린 것이다. 이 불화는 전통 기법이 아닌 서양화법으로 그린 후불탱화이다.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해 소실된 원효사의 중건에 많은 공을 들인 이가 지응현(池應鉉)이고, 지응현의 사위가 오지호이다.

불화의 중앙에는 아미타부처를 두고 좌우로 6대 보살을, 뒤편 좌우로 여섯 제자를 두었다. 중앙의 아미타부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있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길고 가느다란 눈썹과 엄정한 눈은 경주 석굴암의 부처와 닮아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3.04.20 오탈자 수정 [문화재] 바치고 있는→받치고 있는, 19080년→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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