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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47
한자 民主主義-祭壇-靑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진우

[정의]

1980년 5.18민주화운동 이후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과정에서 희생된 청년들.

[개설]

1980년대의 '민족민주열사'들은 '80년 광주의 아들딸'이었다. 민족민주열사들은 5.18민주화운동 이후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진상 규명 투쟁에 절박한 심정으로 선두에 서서 싸웠고 그만큼 희생도 많았다.

[민족민주열사]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돌아가신 분들에게 '민족민주열사'라는 호칭을 부여한 것은 1980년대의 일이다. 1980년 5월 광주가 잔혹한 학살극으로 마무리된 이후 민주화운동 세력은 광주의 경험을 바탕으로 치열한 이론 투쟁을 거치면서 자신들의 운동을 민족민주운동으로 정립해 나갔다. 당면 변혁운동의 성격이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이 주도하여 외세의 지배를 배격하고, 분단 극복·평화통일을 일구어내는 민족운동의 성격과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일구어내는 민주주의운동의 성격이 결합되어 있는 민족민주운동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 결과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포괄적인 호칭도 단순한 '열사'나 '민주열사'가 아니라 '민족민주열사'로 재정립하게 된다.

[1980년 광주의 아들딸]

1980년 5.18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광주의 비극은 항쟁을 지켜봤던 광주 사람들과 양심적인 모든 이들에게 영원한 상처이자 가장 오래된 피멍이 되었다. 특히 5월 27일 새벽에 맞이한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부끄러움'과 '부채의식'으로 각인되었다. 5.18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자신들이 목도한 엄청난 국가 폭력에 전율하면서 폭력을 자행한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광주의 진실로부터 차단되었던 시민과 학생들은 줄기차게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하면서 투쟁하였다. '전국의 5.18들'의 시작이었다.

왜곡되고 은폐된 광주의 진실을 시민들에게 필사적으로 알리는 과정은 큰 결단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광주 학살의 주범들이 쿠데타에 성공하여 권력을 장악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 누구보다도 절박한 심정으로 시민들에게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마저 역사의 제단에 민주주의의 제단에 기꺼이 바치면서까지 5.18의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데 함께 나서자고 호소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그들이 바로 민족민주열사였다. 결국 1980년대 민족민주열사는 '80년 광주의 아들딸'이었던 것이다.

[민족민주열사들의 희생]

1980년 5월 27일 광주에서 새벽에 맞이한 죽음이 있었고, 가장 먼저 자신의 몸을 던져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이는 경상북도 영주가 고향인 서강대학교 학생 김의기 열사[당시 22세]였다. 김의기는 1980년 5월 한국유네스코학생회[Korean UNESCO Student Association, KUSA] '농촌활동 토의 전국지역 간부모임'을 위해 광주에 왔다가 우연히 5월 18일부터 23일까지 광주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동료들의 도움으로 중간에 서울에 올라오지만, 광주의 충격적인 상황을 직접 목격한 김의기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광주가 진압된 지 3일이 지난 5월 30일 서울 종로5가 한국기독교회관 6층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살포한 후 자신도 몸을 던졌다. 아래는 김의기가 남긴 '동포에게 드리는 글' 중 일부이다.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뜨거운 눈동자와 가슴을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1980년 6월 9일, 전태일 정신을 실천하고자 했던 노동자 김종태[당시 23세]는 부산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김의기 열사가 숨을 거둔 지 불과 열흘 후 분신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 앞 사거리에서 "유신잔당 물러가라!", "노동3권 보장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광주시민·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제목의 세 장짜리 긴 글과 '성명서'를 뿌린 뒤 분신하여 운명하였다.

1981년 5월 27일, 광주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4학년이었던 김태훈[당시 23세]이 학교 도서관에서 투신하여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날은 5.18 1주기를 맞아 서울대학교 도서관과 광장 주변에서 교내 시위가 있었다. 이를 지켜본 김태훈은 도서관 6층에서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를 연이어 세 번 외친 뒤 자신의 몸을 도서관 창밖으로 내던졌다. 하지만 김태훈은 평소 말이 없는 스타일이었으며, 시위를 주도하였던 학생들과는 사전에 전혀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당초 학생들은 5월 27일 하루, 교내 추모집회만 계획을 했었다. 그런데 김태훈의 투신 이후 격렬하게 교문 밖으로 진출하였으며, 5월 27일부터 29일까지 사흘 연속 집회를 계속하였다.

1982년 10월 12일, 1980년 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5월 14일부터 16일에 걸쳐 '민족·민주화 성회'를 이끌었던 박관현이 5.18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이다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박관현은 5.18 직전 예비검속을 피해 광주를 빠져나갔는데, 광주의 참상을 듣고 괴로워하였다. 수배 중이었던 박관현은 1982년 4월 체포되어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박관현의 죽음은 당시 침체되었던 광주 지역의 학생운동을 일으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실제로 1982년 10월 13일부터 15일까지 전개된 '박관현 열사 추도 시위'는 5.18 이후 강력한 수준으로 전개되었다.

1985년 8월 15일, 전남도청금남로1가에서 홍기일 열사가 '8.15를 맞이하는 뜨거움의 무등산이여!'라는 전단을 뿌리면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여 분신하였다. 5.18 당시 시민군으로 참여하였다가 총상을 입기도 했던 홍기일은 그 후 건축노동자로 일해 오면서 5.18의 의미를 되새기고 자신의 할 일을 모색하고 있었다고 한다. 광복 40주년을 맞이하였던 그날, 홍기일은 광주항쟁의 역사적 장소인 전남도청 앞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하였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985년 9월 17일, 경원대학교 학생 송광영[당시 28세]이 교내 집회 중 온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학원안정법 철폐하고 독재정권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친 뒤 분신하였다. 송광영은 분신 자살한 첫 대학생이었다.

이후 1987년 6월항쟁 이전까지 이동수[서울대학교 학생, 당시 24세], 이경환[재수생, 당시 19세], 강상철[사회운동가, 당시 23세], 표정두[노동자, 당시 25세], 황보영국[노동자, 당시 27세] 등 5명이 자신의 몸을 역사의 제단에 바치면서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행렬에 동참하였다.

한편 1980년 광주의 경험은 미국이 우리의 우방이자 민주주의와 인권을 옹호하는 국가라는 인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오히려 전두환 쿠데타 세력이 광주 학살을 자행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미국이 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1983년 11월 8일 미 대통령 레이건(Ronald Reagan)의 방한을 앞두고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6층 난간에서 추락사한 황정하[당시 24세]가 시위를 주동하기로 결심한 것도 광주의 아픔에서 기인한다.

1987년 3월 6일 분신한 표정두의 분신 장소가 광화문 주한미국대사관 앞이라는 점도 그렇다. 미국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전두환 쿠데타 세력의 광주 학살은 미국의 배후조종 내지 방조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88년 5월 15일, 명동성당 교육관 4층 옥상에서 "광주 학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면서 할복 투신한 조성만[당시 25세]이 함께 외친 구호 중 하나가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국놈들 몰아내자!"였다.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불붙기 시작한 반독재 민주화투쟁은 국민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단호하게 묵살해버린 전두환의 '4.13호헌조치' 발표로 절정으로 치달았다. 학생, 재야 민주화 인사, 야당, 민중운동 조직, 종교계 간의 연합전선은 6월 10일 전국 각 지역에서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내걸고 '호헌철폐 및 민주헌법 쟁취 국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전날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에 나섰던 이한열은 경찰의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혼수상태에 빠졌다. 여론과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충격과 분노로 들끓었고 6월항쟁은 전국 각지에서 활화산 같은 기세로 분출하였다. 마침내 6월 29일,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직선개헌 수용'을 발표하며 대국민 항복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국민들 손으로 대통령을 뽑게 된 것이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되면서 광주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한 투쟁은 대선의 결과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1987년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12월 9일 목포대학교 학생 박태영[당시 21세]이 분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박태영은 이미 "군부독재 끝장내고 민주정부 수립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42일간 1인 시위를 하고 있었다. 군부독재 종식을 열망하는 절박한 마음이었던 박태영은 유서를 남긴 채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하지만 학살자 전두환을 이은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광주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투쟁은 또다시 위기를 맞는다.

13대 국회에서 '광주 청문회' 이야기가 나오던 1988년 5.18 8주기를 전후한 시기에도 그 절박함을 자살로 표현하였다. 앞에서 언급하였던 서울대학교 학생 조성만의 할복 투신에 이어 5월 18일 단국대학교 학생 최덕수[당시 21세], 6월 4일 숭실대학교 학생 박래전[당시 26세]이 광주 학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면서 연이어 할복하거나 분신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1987년의 대선 결과를 보면서 일시 좌절했던 민중은 1988년 4.26총선의 결과 여소야대 국회가 형성되자 새로운 기대를 갖게 된다.

다시금 6월항쟁의 동력을 살려 '5공 청산 투쟁'과 '광주 학살 진상 규명 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기대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회에서도 새롭게 도입된 청문회 제도를 활용한 '광주 청문회'와 '5공 청문회' 개최에 대한 논의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국회에서의 이러한 모습은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3명의 열사가 온몸을 던져 광주 학살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특히 "광주는 살아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군사파쇼 타도하자!"고 외치면서 분신한 박래전의 문제의식은 뚜렷하였다. 노태우 정권은 군부독재정권의 연장이었던 것이다.

[희생, 그 이후]

여소야대 이후 5.18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학생과 재야 민주화 세력, 야당의 요구로 마침내 국정감사 부활과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5공비리특위]'가 구성되어 5공 청문회가 열렸다. 그러나 발포 명령자 규명 등 완전한 진상 규명에는 실패하였다. 5공 청문회 이후 수세에 몰리던 노태우 정권은 가공할 공안정국을 조성해 나가며 대대적인 민주화운동 탄압에 나섰다. 공안정국은 1990년 초, 노태우 정권 말기까지 이어졌다.

이처럼 40여 년이 흐른 '지금-여기'의 5.18이 있기까지는 수많은 젊음들의 희생이 있었다. 2017년 촛불혁명으로 대통령이었던 박근혜가 탄핵되었다. 이후 대통령이 된 문재인은 당선되고 채 10일도 지나지 않아 2017년 5월 18일 5.18민주화운동 제37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수많은 젊음들이 5월 영령의 넋을 위로하며 자신을 던졌습니다. 책임자 처벌과 진상 규명을 촉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국가가 책임을 방기하고 있을 때, 마땅히 밝히고 기억해야 할 것들을 위해 자신을 바쳤습니다."라고 하며, "광주정신으로 희생하며 평생을 살아온 전국의 5.18들을 함께 기억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민주주의의 제단에 목숨을 바친 청년들을 기억해 달라는 메시지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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