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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산」[송병선]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876
한자 瑞石山-宋秉璿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황민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836년 - 송병선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905년 - 송병선 사망
배경 지역 무등산 -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지도보기
성격 한시
작가 송병선

[정의]

한말의 문인이자 순국지사인 송병선무등산을 유람하고 쓴 한시.

[개설]

송병선(宋秉璿)[1836~1905]의 본관은 은진(恩津)[현 충청남도 논산],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이다. 1877년 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 후에도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 사헌부대사헌 등에 선임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84년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단행되자 반대하는 소를 두 차례 올렸으나 왕의 답을 받지 못하자 은거한 뒤 1885년에 전라북도 무주 구천동에 서벽정(棲碧亭)을 짓고 후학 양성에만 힘썼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두 차례의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렸는데, 상주문(上奏文)[임금에게 아뢰는 글]에 대한 답이 없자 고종을 알현할 목적으로 상경하여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리고 을사늑약 반대 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경무사 윤철규(尹喆圭)에게 속아 납치되어 일본 헌병대에 의해 고향인 대전으로 이송당하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1905년 12월 30일 자결하였다. 저서로 『연재집(淵齋集)』, 『근사속록(近思續錄)』, 『패동연원록(浿東淵源錄)』, 『무계만집(武溪謾集)』, 『동감강목(東鑑綱目)』 등이 있다.

[구성]

「서석산(瑞石山)」은 1구에 7자씩 모두 8구로 이루어진 칠언율시이다.

[내용]

「서석산(瑞石山)」

자산형승관남주(玆山形勝冠南州)[이 산의 형승 남쪽 고을 중 으뜸이라]/ 십재유심금시수(十載有心今始酬)[십 년을 마음에 두다가 이제야 올랐다네]/ 만인혈대인탕배(萬仞穴臺人盪背)[만길의 혈대는 사람의 등을 씻어 주고]/ 천총서석검첨두(千叢瑞石劒尖頭)[천 무더기 서석은 칼끝처럼 뾰족하네]/ 군산반지고무대(羣山蟠地高無對)[땅에 서린 뭇 산들 높이를 대적할 수 없고]/ 대해연천벽불류(大海連天碧不流)[하늘에 닿은 큰 바다의 푸른빛은 흐르지 않네]/ 비하비노회수망(飛下毗盧回首望)[비로봉에 날아 내려와 고개 돌려 바라보니]/ 표연각사상청유(飄然卻似上淸遊)[표연히 상청에서 노니는 듯하여라]

[특징]

「서석산」송병선의 문집 『연재집(宋秉璿)』 1권에 실려 있다. 3구에서 '혈대'는 풍혈대(風穴臺)를 가리키는 말로, 무등산 규봉사(圭峯寺) 옆 석벽 아래에 있다. 풍혈대와 관련해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규봉사(圭峯寺) 곁 석벽 아래에 있다. 길이가 한 자이고 너비가 다섯 치이며, 바람이 불다 그쳤다 한다. 속칭 그 석벽을 풍혈대라 한다. [在圭峯寺傍石壁下, 長一尺廣五寸, 風或生或止, 俗名其石壁爲風穴臺]”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연려실기술』에도 풍혈대를 무등산 십대(十臺) 중 하나로 소개하고 있다. 서석산무등산의 별칭이다.

[의의와 평가]

「서석산」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한학자이자 우국지사인 송병선의 시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서, 20세기 초 문인들의 무등산 유람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시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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