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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4678
한자 古典文學
영어공식명칭 Classical Literature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조선/조선
집필자 박세인

[정의]

상고 시대부터 개화기 이전까지 전라도 광주 지역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문학 작품.

[개설]

문학은 언어로 이루어진 예술이다. 언어에는 말로 이루어진 음성언어와 글자로 이루어진 문자언어가 있는데, 이에 따라 문학에는 말로 전하여 오는 구비문학과 문자로 전승되는 기록문학이 있다.

상고 시대부터 개화기 이전까지를 전통 시대라고 부르는데, 문학의 한 갈래인 고전문학은 전통 시대에 형성된 구비문학과 기록문학을 말한다. 고전문학에서 설화·민요·무가·판소리·민속극·속담·수수께끼 등은 구비문학에 속한다. 또한, 기록문학에는 시가 갈래로 상대가요·향가·고려속요·경기체가·시조·가사·한시 등이 있으며, 산문 갈래로 고수필·고소설 등이 있다. 이 중 광주 지역 고전문학을 형성하는 주요 갈래로 구비문학에 설화·민요·무가·판소리 등이 있고, 기록문학에는 고전 시가에 속하는 시조·가사와 한문학에 속하는 한시 및 산문이 있다.

[구비문학]

전라도 광주 지역의 구비문학은 설화·민요·무가·판소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설화에는 인물이나 지명과 관련된 전설이 많다. 대표적인 인물전설로 신화적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견훤 전설, 다양한 파생담을 가진 김덕령 전설 등이 있다. 또한 지명전설에는 광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무등산 주변의 지명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으며, 현재는 존재하지 않은 태봉산(胎封山)경양지(慶陽池) 관련 이야기도 지명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광주 지역 민담으로 효행담이 많이 전해지고 있는데, 「둘째아들이 효자」, 「어머니와 지렁이」, 「아들을 버린 효부」 등이 대표적이다.

전라도 광주를 대표하는 민요에는 용전들노래, 「서창 들노래」, 「콩밭매기 노래」 등의 노동요와 「상여소리」, 「달구질소리」 등의 의식요가 있다. 무속의례에서 무속인이 부르는 무가를 보면 「성주풀이」, 「손님풀이」, 「오구풀이」, 「제석풀이」 등이 전승되고 있다. 한편 광주는 판소리 문학을 전승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서편제의 주요 전승 지역으로서, 「남도창동편제」, 「남도판소리」, 「판소리춘향가(동초제)」, 「판소리고법」 등을 시 지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백제 시대의 부전 가요]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옛 노래는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 속악(俗樂) 편에 백제 시대의 노래로 소개된 「무등산」이다. 「무등산」은 노래가 만들어지고 불리어진 배경담만 간략히 소개되고 있을 뿐 노랫말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 즉 「무등산」은 노래 가사가 전해지지 않은 부전 가요라 할 수 있다. 『고려사』 「악지」에 소개된 내용을 보면 「무등산」무등산에 성을 쌓은 후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백성들의 기쁨을 담은 노래이다.

[시조문학]

전라도 광주 지역에 전해지고 있는 시조문학은 대부분 15~16세기 조선 전기에 창작된 작품이다. 지금까지 작품이 전해지고 있는 광주 출신 시조 작가로는 이조원(李調元)[1433~1510], 기대승(奇大升)[1527~1572], 고경명(高敬命)[1533~1592], 김덕령(金德齡)[1567~1596], 정충신(鄭忠信)[1576~1636] 등이 있다.

이조원은 연산군의 폭정을 보고 관직에서 물러나 광주로 귀향한 인물로, 작품으로는 「연화조(蓮花操)」 한 수와 「환향가(還鄕歌)」 한 수 등 두 수의 시조가 전해지고 있다. 「연화조」는 단종의 폐위를 애통해하며 지은 작품이고, 「환향가」는 나라의 앞날을 염려하는 우국심을 담은 작품이다.

기대승은 조선 전기 명망 있는 성리학자이자 문신이다. "호화(豪華)코 부귀(富貴)키야"로 시작하는 시조 한 수를 남기고 있는데, 기대승의 문집인 『고봉집』에는 수록되지 않고 시조 가집에 실려 전하고 있다.

고경명임진왜란 때 순절한 의병장이자 시인으로, 광주 압보촌[현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의 옛 이름]에서 태어났다. 고경명의 작품으로 알려진 시조는 세 수인데, 이 중 두 수는 전하는 문헌에 따라 작가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서 논란이 있다.

김덕령은 광주 석저촌[현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의 옛 이름]에서 태어났다. 김덕령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물리쳤으나 무고로 인해 29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김덕령이 옥중에서 지었다고 알려진 시조 「춘산곡(春山曲)」 한 수가 유고 문집인 『김충장공유사(金金忠壯公遺事)』에 전한다.

정충신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7세의 나이로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1537~1599]을 도와 큰 공을 세웠으며, 이괄(李适)의 난 때 전공을 세워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시조 세 수가 여러 가집에 전하고 있는데, 이 중 두 수는 가집에 따라 작가가 다르게 표기되어 있어서 논란이 있다.

[가사문학]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 가사문학이 가장 성행한 시기는 16세기이다. 16세기 호남 지역에는 광주의 대표적 명산인 무등산 권역을 중심으로 많은 누정이 건립되었다. 이 중 광주와 전라남도 담양(潭陽)을 경계로 흐르는 증암천 유역 일대에는 김윤제(金允悌)가 지은 환벽당(環碧堂), 양산보(梁山甫)가 지은 소쇄원(瀟灑園), 김성원(金成遠)이 지은 식영정(息影亭) 등이 있는데, 송순(宋純)[1493~1582]은 환벽당, 소쇄원, 식영정을 '한 마을에 명승이 세 곳'이라는 뜻으로 '일동지삼승(一洞之三勝)'이라 불렀다.

누정 공간에서 이루어진 문예 활동은 조선 전기 호남 지역의 가사문학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광주를 비롯한 무등산 권역의 여러 문인들은 이들 누정을 중심으로 성산시단(星山詩壇)을 이루어 문학적 교유를 활발히 나누었다. 성산시단의 문학 활동 중 가사문학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흐름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조선 전기 호남 가사문학의 핵심적인 작품들이 창작되었다는 점이다.

성산시단을 출입한 주요 문인 중 16세기 가사문학의 중요한 작가로 송순정철(鄭澈)[1536~1593]을 꼽을 수 있다. 송순은 담양에서 면앙정(俛仰亭)을 경영하며, 가사 「면앙정가(俛仰亭歌)」를 창작했다. 일명 「무등산가」로도 불리는 「면앙정가」는 면앙정에서 조망되는 아름다운 사경(四景)과 유유자적한 삶에 작가의 흥취를 담아 노래하고 있다.

송순으로부터 시가 창작의 영향을 받은 정철은 성산의 자연을 배경 삼아 「성산별곡(星山別曲)」을 창작하였다. 「성산별곡」은 손님과 주인이 주고받는 대화를 주객 문답체 형식으로 지은 가사로, 자연에 은둔하며 풍류생활을 즐기는 주인의 고결한 삶을 예찬하고 있다.

「면앙정가」「성산별곡」과 같이 자연을 벗 삼아 지내면서 세속에서 벗어난 안빈낙도(安貧樂道)[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김]의 삶을 찬미하며 강호가도(江湖歌道)를 구현하고 있는 가사를 '강호은일 가사'라고 한다. 두 작품을 통해 16세기 광주를 포함한 무등산 권역 사대부 문인들이 긴밀한 문학적 유대 관계 속에서 강호은일 가사를 적극적으로 창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강호은일형 가사는 정극인(丁克仁)[1401~1481]의 「상춘곡(賞春曲)」을 통해 문학사에 처음으로 등장하였으며, 이후 조선 전기 가사문학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이 과정에서 「면앙정가」는 강호가도를 본격적으로 구현하였으며, 「성산별곡」은 강호가도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며 강호은일 가사의 계보를 완성한 작품이라는 문학사적 평가를 얻고 있다. 한편, 16세기 가사문학의 흥기를 주도했던 강호은일가사는 17세기 이후에는 광주와 무등산 권역에서 거의 창작되지 않고 있다.

이 밖에 정철은 담양의 송강정(松江亭)에서 조선 가사문학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칭송되는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창작함으로써 호남 가사문학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또한, 양산보가 부모를 위해 일명 '효자가'로 불리는 「애일가(愛日歌)」를 창작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작품은 전하고 있지 않다.

[한문학]

한문학은 한문으로 기록한 문학작품으로, 시가문학인 한시와 서사문학인 한문 산문, 한문 소설 등이 있다. 한자와 한문 구사에 능숙했던 전통시대 문인들에게 한시문을 창작하는 일은 일상적 교양활동이었다. 따라서 전라도 광주 지역에는 방대한 규모의 한시와 한문 문장이 개인 문집을 통해 전승되고 있다.

광주 지역에서 한문학이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16세기이다. 이는 17세기 뛰어난 문인이자 비평가였던 이수광(李睟光)[1563~1628]과 허균(許筠)[1569~1618]의 저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수광은 그의 저서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근세에 뛰어난 호남 시인으로 박상(朴祥), 임억령(林億齡), 임형수(林亨秀), 김인후(金麟厚), 양응정(梁應鼎), 박순(朴淳),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임제(林悌), 고경명(高敬命) 등을 언급하였다. 허균 역시 비슷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지봉유설』에서 소개된 문인 외에 뛰어난 호남 문인들로 최산두(崔山斗). 유성춘(柳成春), 유희춘(柳希春), 양팽손(梁彭孫), 나세찬(羅世纘), 송순, 오겸(吳㻩), 이항(李恒), 기대승 등을 언급하였다.

이수광과 허균이 언급한 16세기 호남 문인들은 광주를 중심으로 인근의 담양, 화순(和順), 장성(長城), 나주(羅州) 등에 거주하였으며, 서로의 거소와 누정을 오가며 학문적·문학적으로 깊은 유대 관계를 맺었다. 이에 따라 가히 '호남 시단'이라 명명할 수 있을 정도로 광범위한 문예적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다양한 작가가 배출되고 수준 높은 시문들이 창작되었다. 이러한 16세기 호남 문인들의 괄목할 만한 문학적 자취는 호남 지역을 넘어 조선 시대 한문학이 번성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중 광주에서 태어난 박상, 박순, 고경명 등은 한시 창작으로 특히 이름이 높았으며, 기대승은 다양한 성리학적 저술을 통해 학문적 자질을 발휘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 광주 지역 한문학의 전개 양상 중 주목할 만한 점은 무등산을 유람하고 그 여정과 감상을 기록한 무등산 유산기(遊山記)가 활발히 창작되었다는 점이다. 무등산 유산기는 15세기 후반 정지유(鄭之遊)「유서석산기(遊瑞石山記)」를 시작으로, 16세기 후반 고경명「유서석록(遊瑞石錄)」[1574] 등의 작품이 있으나, 그 후로 한동안 창작되지 않았다. 이후 18세기 후반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유서석산기」[1778]를 쓴 이래, 19~20세기에 16편이 집중적으로 창작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19세기 이후 문인들 사이에 지역 명산을 유람하는 풍조가 유행하였으며,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광주 지역 명산인 무등산 유산기가 집중적으로 창작되었음을 나타낸다. 20여 편에 가까운 무등산 유산기는 무등산의 풍경과 특징에 대한 시기별 정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당시 문인들의 유람 목적과 흥취를 이해할 수 있는 인문학적 자료이다.

한편 19세기 이후 광주 지역 한문학은 기정진(奇正鎭)[1798~1879]의 제자들이 주도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기정진의 손자 기우만(奇宇萬)[1846~1916]을 비롯하여 오준선(吳駿善)[1851~1931], 박노술(朴魯述)[1851~1917] 등이 있다. 이들이 주로 활동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엽은 조선 사회가 크게 요동친 역사적 격변기이자, 전통시대 문학이 종언을 고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문예적 배경 속에서 근대의 광주 문인들은 지역 유생들을 규합하고 독려하며 외세를 배격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1910년 대한제국의 국권 상실 이후 시작된 일본의 식민 통치에 맞서 의병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면모를 보이며 시대의 다양한 문제를 주제로 한 많은 한시문을 남기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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