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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척사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3220
한자 衛正斥邪
이칭/별칭 위정척사 운동,위정척사 사상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영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조선 말기 - 서양 문명 수용에 대한 반대 운동

[정의]

"바른 것(正)을 지키고 잘못된 것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조선 후기에 발생한 서양의 문물과 종교를 배격하는 운동.

[개설]

19세기 중반 이후 심화되어 가는 조선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 서구 제국주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사회 개혁론이다. 조선을 위협하는 국내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적인 시도였으나, 기존의 성리학적 질서만을 옳은 것으로 규정하는 개혁이라는 점에서 그 한계가 있다.

[역사적 배경]

19세기 중반 이후의 조선은 대내적으로 사회 질서가 무너져 가고, 대외적으로는 서구 제국주의의 도전과 침략이 국가 체계를 위협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위정척사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성리학자들이 제기한 사회 개혁 운동이다. 위정척사는 성리학적 질서를 중심으로 조선의 문명은 바른 것[正]으로, 침략 세력인 서구 세력과 문명을 잘못된 것[邪]으로 규정한다.

19세기 후반의 조선 사회는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관료들의 수탈과 폭정이 심해지고, 전국 각지에서 백성들의 반발이 빈발하였다. 관료 계층의 전정(田政)과 군정(軍政)을 통한 경제적 약탈의 피해는 국가 재정의 약화로까지 이어졌다. 조선은 대외적으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여파로 천주교라는 서학(西學)이 전파됨으로써 성리학적 사회 질서는 더욱 크게 요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성리학자들은 천주교가 전통 사회를 위협하는 위험한 사상이라 하고 정학(正學)인 유교를 강화하고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여 배척하기 시작하였다.

[운동 전개]

19세기 조선 사회는 정치 체제 모순과 외부로부터 서양 문화의 유입으로 그 근간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위정척사 사상을 민족주의 사상으로 발전시킨 대표적인 사람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이다. 이항로와 기정진은 1866년 척화소(斥和疏)를 지어 올렸다. 이 가운데 기정진은 호남의 대표적인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기정진의 내수외양론(內修外攘論)은 농민 봉기가 격해지고,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이 구체화되는 모순의 해결을 조선의 체제 및 질서 유지를 통하여 극복하려는 생각이 담겨 있다.

기정진은 19세기 조선 사회의 위기 원인을 관리들의 부정부패 때문이라 규정하고, 백성들의 민생을 중시하는 정책을 펼 것을 주장하였다. 기정진은 「임술의책(壬戌擬策)」을 통하여 삼정의 폐단을 지적하여 재화의 공정한 분배와 신분과 상관없이 세금 수취를 하여야 하며, 서원 철폐와 과거제 개혁 등을 주장하였다. 기정진은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자 「병인소(丙寅疏)」를 지어 조선 사회의 개혁을 통하여 서구 제국주의를 물리칠 것을 주장하였다.

기정진의 위정척사 정신은 척사 논의의 주체가 화이관(華夷觀)에서 보이는 문화적 차원에서 국가라는 민족적인 차원으로의 이행을 보여준다. 또한 기정진은 척사에 대한 군민(君民)의 합일된 결의를 촉구하여 국가의 일정한 정책과 만민이 하나가 될 것을 주장하였다. 이를 통하여 밀려오는 서양 세력에 흡입되고 동화될 가능성에 대하여 경계하여 계책을 세워야 함을 주장하였다.

기정진의 이러한 민족 주체적인 위정척사 사상을 이어받아 실천한 사람은 기우만(奇宇萬)송병선(宋秉璿)이다. 기우만은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조선과 일본이 우호조약을 체결하고, 1895년 을미년 8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그 해 겨울 단발령이 시행되자 「을미소(乙未疏)」를 올리고, 일제의 만행과 위정자들의 친일개화를 응징하고 배격하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또한 기우만은 1905년 을사늑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되자 결사 항쟁을 호소하였다. 이러한 위정척사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담판문이나 상소문 등에 나타난 의병 정신은 바로 항일정신으로 계승된다.

[결과]

위정척사는 성리학적 질서와 민족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도덕적 측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와 정치적 현실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시작된 사상 운동이다. 위정척사는 성리학적 가치 지향을 전제한 개혁론이기에 한계성을 지닐 수밖에 없지만, 당시 조선 사회의 비판과 개혁의 방향은 공허한 담론에서 벗어나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부분을 개혁하고자 한다. 나아가 위정척사는 사회 제도 개혁을 통하여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킴으로써 외부로부터 밀려오는 외부 세력에 대응하고자 하였으며, 국가 경제 안정화를 통하여 국가 체제의 재구축을 강조하였다.

[의의와 평가]

위정척사는 개항을 요구하는 제국주의 세력을 물리치고자 하였으며, 나아가 국가 경제와 백성들의 삶의 안정을 통하여 민족의 생존권과 경제 침탈을 막고자 하였다. 하지만 위정척사 운동은 성리학적 질서를 통하여 외세에 대응하고자 하였으며, 의병운동으로 확대하여 나갔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위정척사 운동이 실패한 원인은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철학에 근거하지 않고, 성리학적 질서만을 강조함으로써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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