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244
영어공식명칭 Ryu Dongu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진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61년 1월 1일연표보기 - 류동운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80년 5월 - 류동운 한국신학대학 2학년 재학
활동 시기/일시 1980년 5월 22~27일 - 류동운 5.18민주화운동 시민학생수습대책위원회에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80년 5월 27일연표보기 - 류동운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7년 5월 - 5.18구묘지에서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
활동지 옛 전라남도청 - 광주광역시 동구 문화전당로26번길 지도보기
묘소 국립5.18민주묘지 - 광주광역시 북구 민주로 200[운정동 563]지도보기
성격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성별
대표 경력 한국신학대학 학생|시민학생수습대책위원회 위원

[정의]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활동하였던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개설]

류동운[1961~1980]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한국신학대학[지금의 한신대학교] 2학년 학생으로 서울에서 부모가 계신 전라남도 광주시로 내려와 시민군의 시민학생수습대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5월 27일 마지막 날, 옛 전라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류동운은 1980년 5월 18일부터 시위에 참여하던 중 5월 20일 계엄군에게 붙잡혀 연행되었다가 5월 22일에 석방되었다. 류동운은 석방되자 다시 전라남도청에 들어가 시민학생수습대책위원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수습대책위원회는 수습파와 항쟁파로 나뉘어 있었다. 류동운은 "무기를 반납하는 것은 사태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투항하는 것"이므로 결코 안 된다는 입장에 서 있었다. 결국 수습대책위원회는 조직이 재편되었고, 청년들을 중심으로 마지막까지 계엄군에 항쟁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자체적으로 전라남도 광주시의 치안 질서 유지와 사상자 수습 등의 역할을 분담하였으며, 류동운도 수습대책위원회와 함께하였다.

5월 23일 류동운의 아버지가 전라남도청에 찾아와 아들을 데리고 나갔다. 하지만 류동운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5월 26일 전라남도청으로 다시 들어갔다가 5월 27일 계엄군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였다. 사망 원인은 좌상골반부 맹관 총상이었다.

3일이 지난 뒤 경찰서에서 가족들에게 연락이 왔다. 사망자 시신의 지문을 채취하여 신원을 확인해 보니 류동운이라는 것이다. 가족들은 망월묘지공원[5.18구묘지]에 가서 류동운의 시신을 확인하였다. 1997년 5월 국립5.18민주묘지로 이장되었다.

[묘소]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묘지번호는 2-45이다.

[상훈과 추모]

「5.18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