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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025
한자 知訥
영어공식명칭 Jinul
이칭/별칭 목우자,불일보조,보조 국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고려/고려
집필자 최원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158년연표보기 - 지눌 출생
몰년 시기/일시 1210년연표보기 - 지눌 사망
출생지 황해도 서흥군
성격 승려
성별
대표 경력 국사

[정의]

고려 후기 조계종을 창시해 한국 불교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전라남도 광주 지역 무등산에서 수도하였던 승려.

[개설]

지눌(知訥)[1158~1210]은 1158년(의종 12) 황해도 서흥군에서 출생하였다. 8세가 되던 해 사굴산파(闍崛山派)의 종휘(宗暉)에게 출가하였다. 속성은 정(鄭), 호는 목우자(牧牛子),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이다.

[활동 사항]

1182년(명종 12) 승과(僧科)에 급제한 뒤, 보제사(普濟寺)에서 개최한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석하여 당시 불교계의 타락상을 비판하면서 동지 10여 명과 함께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거하여 결사를 맺을 것을 약속하였다. 처음에는 창평[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의 청원사(淸源寺)에 들어가 경전을 연구하였는데, 1190년(명종 20) 대구 팔공산의 거조사(居祖寺)에서 수도하던 중 정혜사(定慧社)를 결성하고 결사의 무리들이 지켜야 할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을 짓게 되었다.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통해 선(禪)과 교(敎)에 집착하지 않고 깨달음의 본질을 모색한 것이다.

1200년(신종 3)에는 조계산으로 옮겼으나 가까운 곳에 정혜사(定慧寺)가 있어 수선사(修禪社)로 개명하였고, 이후 1210년(희종 6) 입적까지 수선사에 머물면서 대중을 교화하였다. 수선사가 송광산에 자리하게 되면서 지역의 불교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수선사의 역대 주법(主法) 가운데 2세 혜심(慧諶)은 전라남도 화순 출신, 5세 천영(天英)은 전라북도 남원 출신, 6세 충지(冲止)는 전라남도 장흥 출신이었다. 또한 천태종의 요세(了世)가 전라남도 강진 백련사(白蓮寺)에서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일으킨 것도 지눌의 영향을 받아서였다.

무등산에 있는 규봉암(圭峰庵)의 경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화순현 기록에 의상(義湘) 대사가 창건하였다고 기록하였으나, 김군수(金君綏)가 지은 「조계산수선사불일보조국사비명(曹溪山修禪社佛日普照國師碑銘)」에는 보조(普照) 국사가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188년(명종 18) 정혜결사를 위해 팔공산의 거조사로 들어간 것으로 보아 1182~1188년 사이에 무등산 규봉암에서 수도한 것으로 보인다.

[사상과 저술]

지눌의 불교관은 정혜쌍수와 돈오점수로 나타난다. 정혜쌍수는 선정의 상태인 정과 사물의 본질을 살피는 지혜로 정과 혜를 함께 수행하는 것이고, 돈오점수는 실천적인 방안으로 깨달음[돈오] 뒤에도 과거의 습기(習氣)를 제거하기 위해 지속적인 종교적 실천[점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묘소]

1210년(희종 6) 지눌은 승도를 소집하여 법복을 입고 당(堂)에 올라가 설법하다가 주장(柱杖)을 잡은 채 입적하였다. 입적 후 7일 후에 화장을 하였고, 사리를 거두어 수선사 북쪽에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다. 지눌은 국사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불일보조, 탑호는 감로(甘露)이다. 현재 송광사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송광사보조국사비(松廣寺普照國師碑)와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감로탑(普照國師甘露塔)이 있다.

송광사보조국사비는 원래 1210년(희종 6)에 세웠던 것을 1678년(조선 숙종 4)에 다시 세운 것이다.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감로탑은 1210년(희종 6) 지눌이 열반한 후에 시호와 함께 탑호를 받았는데, 3년 뒤인 1213년(강종 2)에 세워졌다. 탑은 송광사 내에서 몇 차례 자리를 옮기다가 현재 원래의 위치로 돌아왔으며, 바닥 돌을 제외하고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고려 후기 승탑의 양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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