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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맹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787
한자 高孟英
영어공식명칭 Go Maengyeong
이칭/별칭 영지(英之),하천(霞川)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창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02년연표보기 - 고맹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40년 - 고맹영 별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46년 - 고맹영 예조좌랑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47년 - 고맹영 사헌부감찰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51년 - 고맹영 옥천군수 부임
활동 시기/일시 1561년 - 고맹영 강원도관찰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63년 - 고맹영 호조참의 역임
활동 시기/일시 1565년 - 고맹영 관작 삭탈 및 귀양
몰년 시기/일시 1565년연표보기 - 고맹영 사망
묘소|단소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 101-1 지도보기
성격 문관
성별
본관 장흥(長興)
대표 관직 옥천군수|강원도관찰사|호조참의|대사간

[정의]

조선 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옥천군수, 강원도관찰사, 호조참의,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고맹영(高孟英)[1502~1565]의 본관은 장흥(長興)이며, 자는 영지(英之), 호는 하천(霞川)이다. 할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고자검(高自儉), 아버지는 고운(高雲)이고, 어머니는 이호선(李好善)의 딸이다. 부인은 남평서씨(南平徐氏)이고, 아들은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다.

[활동 사항]

고맹영은 1540년(중종 35)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1546년(명종 1) 예조좌랑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547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1550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1551년(명종 6) 옥천군수(沃川郡守)에 부임하여 외직 생활을 하였다. 옥천군수 시절인 1553년(명종 8)에는 당시의 폐단을 없애고 선정을 베풀어서 조정에서 포상을 받았다.

옥천군수가 된 지 7년 뒤인 1558년(명종 13)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부임하였으며,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등을 역임한 뒤 1560년(명종 15)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이 되었다. 1561년(명종 16)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임명되면서 다시 외직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체직(遞職)되어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가 되었다. 이후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비롯하여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형조참의(刑曹參議), 병조참의(兵曹參議), 병조참지(兵曹參知), 이조참의(吏曹參議), 호조참의(戶曹叅議) 등 다양한 관직을 경험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고맹영이 이량(李樑)의 당여로서 행실이 바르지 못함이 자주 지적되고 있는바, 결국 1565년(명종 20)에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귀양길에 올랐다.

[학문과 저술]

고맹영은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 당시에 기주관(記注官)으로서 이름을 올렸다.

[묘소]

고맹영의 묘소는 의병장 고경명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된 추원각(追遠閣)[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 101-1번지] 뒤편에 있다.

[상훈과 추모]

고맹영은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612년(광해군 4) 고맹영의 손자이자 의병장 고경명의 아들인 고용후(高用厚)가 상소를 올려 고맹영의 복권을 요청하였고, 그것이 받아들여져 고맹영의 관작이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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