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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선개헌 반대시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828
한자 三選改憲反對示威
이칭/별칭 3선개헌 반대투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연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69년 9월연표보기 - 3선개헌 반대시위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69년 12월연표보기 - 3선개헌 반대시위 종결
발단 시기/일시 1967년 6월 -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부정선거로 개헌 가능선인 129석 확보
전개 시기/일시 1969년 7월 17일 -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결성
전개 시기/일시 1969년 8월 7일 - 개헌안 국회 상정
전개 시기/일시 1969년 8월 16월 -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전국 유세 시작
전개 시기/일시 1969년 9월 5일 -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학생 개헌반대 성토대회 개최
전개 시기/일시 1969년 9월 7일 -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전라남도 광주시 유세
전개 시기/일시 1969년 9월 11일 -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법과대학 학생 3선개헌 반대 성토대회 개최 및 농과대학·상과대학 학생들과 시위 행진
전개 시기/일시 1969년 9월 14일 - 개헌안 국회에서 변칙·통과
전개 시기/일시 1969년 9월 15일 - 전남대학교 대학본부 임시휴강 선포
전개 시기/일시 1969년 10월 17일 - 개헌안 국민투표 통과

[정의]

1969년 박정희 정부의 3선개헌을 반대했던 전라남도 광주시 전남대학교 학생들의 시위.

[역사적 배경]

1963년 12월 개정된 제3공화국 헌법은 대통령의 연임을 1회로 한정하였다. 이에 제5~6대 대통령을 연임한 박정희는 제3공화국 헌법으로는 더 이상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대통령 3선을 위해 박정희는 헌법 개정에 필요한 ⅔ 의석 확보를 목적으로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를 부정행위로 점철시켜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⅔를 넘는 129석을 확보하였다.

1968년 12월 민주공화당 당의장 서리 윤치형이 개헌 논의를 표면화하였고, 이후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민주공화당 내 개헌추진파를 중심으로 개헌 작업이 추진되었다. 박정희 정부와 민주공화당의 개헌 추진에 반대하여 신민당은 1969년 1월 14일 호헌 5인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7월 17일에는 신민당 및 「정치활동정화법」 해금인사, 재야인사 등을 규합하여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각 대학 학생운동 세력들은 1969년 6월경부터 본격적인 3선개헌 반대투쟁을 벌이고 있었고, 9월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경과]

1969년 8월 7일 국회에 개헌안이 상정되자,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는 8월 16일부터 전국 유세를 시작하여 9월 7일 전라남도 광주시에서도 대규모 유세를 열었다. 한편, 8월 31일에는 신민당 전라남도 광주시 갑구 국회의원 정성태와 중앙당 상무위원 한영수, 3선개헌반대국민투쟁위원회 전남지부 운영위원 최종채 3명이 '3선개헌반대 민주수호행진'이라는 이름 아래, 4.19학생의거기념탑에서부터 서울까지 도보 행진을 벌였다.

1969년 9월 5일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학생들의 '개헌반대 성토대회'를 비롯하여 9월 11일에는 더 큰 규모의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 날, 전남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 법과대학 학생 등 300여 명은 '3선개헌 반대 성토대회'를 가지고, 농과대학 학생과 상과대학 학생들의 호응을 얻어 대학본부 쪽으로 행진하다가 총장과 교직원들의 제지로 자진 해산하였다. 다음 날인 9월 12일에는 의과대학 학생 300여 명이 교내 강당에서 3선개헌 반대 농성에 들어갔다가 4시간 만에 해산하였다. 연이은 학생들의 시위에 전남대학교 대학본부는 9월 15일 임시 휴강을 선포하였다.

[결과]

3선개헌 반대시위는 1969년 9월 14일 민주공화당에 의해 개헌안이 '날치기'로 통과되고, 대학 및 고등학교 등에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소강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개헌안은 1969년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 77.1% 투표율, 65.1%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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