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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700
한자 歷史
영어공식명칭 Historic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노성태

[정의]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광주광역시의 역사.

[연혁]

광주광역시는 삼한시대에는 마한, 삼국 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였다. 백제 때 광주광역시는 무진주, 통일신라시대에는 무주라 불렀으며, 광주라는 명칭은 940년(태조 23)에 처음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인 1018년(현종 9) 행정구역을 재편할 때 해양현(海陽縣)으로 강등되었다가 그 후 주로 승격되었으나 1310년(충선왕 2)에 다시 화평부(化平府)로 강등되고 1362년(공민왕 11)에는 무진부(茂珍府)로, 1373년(공민왕 22)에 다시 광주로 불렸다.

조선시대 전라도는 좌·우도가 있었는데 광주목은 좌도에 속해 있었다. 1430년(세종 12)에 고을 백성 노흥준의 광주목사 신보안 구타 사건으로 무진군으로 강등되었다가 1452년(문종 1)에 광주목으로 명칭이 회복되었다. 이후 1489년(성종 20)에 광주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501년(연산군 7)에 회복되었고, 그 후 1701년(숙종 27)에 또 한 번 광산으로 개칭되나 6년 뒤 광주로 명칭을 회복하였고, 1895년(고종 32)에 광주군으로 변경되었다.

일제의 국권 강탈이 이루어진 1914년에는 조선총독부 지방관제 발포(發布)로 광주는 면이 되고, 1931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광주읍이 되었다가, 1935년 광주부가 설치됨으로써 행정구역은 41정(町)으로 확대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9년 광주부광주시가 되었고, 이후 1973년 7월 1일 구제(區制)가 시행되었으며, 1986년 11월 1일 「광주직할시 설치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광주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직할시가 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어 ‘광주광역시’가 되었다.

[광주광역시의 역사]

광주광역시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출토된 유적이나 유물을 통해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다. 상무(尙武) 신도심을 개발하면서 확인된 인근의 광주광역시 서구 치평동 구석기 유적은 12만 5000년 전의 삶의 흔적임이 확인되었고, 남구 대촌동, 이장동과 경계에 있는 송암동 임정마을에서는 청동기시대 집터가 발견되었으며, 집터에서는 민무늬 토기 조각, 석기류 등 80여 점도 출토되었다. 또한, 청동기시대 지배자인 군장의 무덤인 고인돌이 남구 지석동, 용두동 일대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이를 통해 구석기시대부터 광주광역시 서남쪽의 대촌천, 지석천, 극락강변의 야산 및 구릉 지대를 중심으로 선사인들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광주광역시에 존재한 최초의 정치체는 기원전 2~3세기경부터 6세기 중엽까지 나주 영산강 유역에 있었던 마한(馬韓)이었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보이는 54개 마한 소국 중 광주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는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 일대에 있었던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과 나주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불미지국(不彌支國)을 들 수 있으나 불미지국은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동의 덕산·대안·신촌리에 40여 기의 고분군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나주 일대로 추정하기도 하나 구사오단국의 경우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동 등지에서 발굴된 고분이 발견되지 않았고, 마한의 성장 기반이 된 청동기시대의 고인돌이 없어 그 추정에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구사오단국의 위치를 선사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다수 발견된 남구 대촌천 일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전라도 광주를 포함한 나주·영산강 유역의 마한은 6세기 중엽이 되어서야 백제에 완전히 복속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 따르면 백제의 군현은 모두 147개였다. 그중 전라도 지역은 중·동·남·서·북 5방의 하나인 남방의 구지하성(久知下城)에 속하였으며, 13군 42현이 있었다. 광주는 무진주(武珍州)로 불리었으며,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남평 일대], 복룡현(伏龍縣)[평동 일대], 굴지현(屈支縣)[창평 일대]을 관할하였다. 당시 무진주는 발라(發羅)[나주], 월나(月奈)[영암]와 함께 일본 및 중국과 교통할 수 있는 중요한 해상 교통로 중의 하나로 문물 교역의 요지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는 백제의 멸망과 부흥 운동의 실패로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확대된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전국을 9주로 나누었다. 당시 광주의 명칭은 무진주였으며, 지방 장관인 도독(都督)이 파견되어 통치하였다. 『삼국사기』에는 686년(신문왕 6)에 무진주가 처음 설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광주읍지(光州邑誌)』 읍선생조를 보면 678년(문무왕 18)에 아찬 천훈이 무진주 도독으로 파견된 기록도 있다. 무진주는 이후 757년(경덕왕 16년)에 무주로 개편되었으며, 무주는 현웅현[남평], 용산현[나주 일부], 기양현[창평]을 관할하고 전라도 지역의 행정 중심지가 되어 15군 32현을 다스리게 되는데, 오늘날의 전라남도 행정구역의 근간이 된다. 당시 최소의 지방 행정구역은 촌이었으므로 무주에도 몇 개의 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촌은 대략 10호가량의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혈연집단이 거주하는 자연 부락을 기준으로 편성된 것이었다.

통일신라는 궁성을 호위하는 시위부와 9서당의 중앙군 이외에 10정(十停)이라는 지방군을 두었다. 10정 중의 하나가 미다부리정(未多夫里停)이고, 무주에 직속되었던 현웅현에 있는 흑색금(黑色衿)의 군단이었다. 무진도독이 근무하였던 무진도독고성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與地圖書)』,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광주목지』, 『대동지지(大東地志)』, 『광주읍지』 등에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무진도독 때의 옛 토성은 둘레가 2,650보다.”라고 서술되어 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무진도독고성은 현의 북쪽 5리[약 2㎞]에 있다. 흙으로 쌓았고 둘레는 32,448척[약 9.8㎞]이다.”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이후 기록은 현이 주로 바뀔 뿐 『신증동국여지승람』처럼 단편적이다. 일단 문헌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무진도독고성이 고려 말에 축조된 광주읍성의 북쪽 5리에 있었고, 흙으로 쌓은 토성이고, 둘레가 3만여 척으로 8,253척[약 2.5㎞]인 광주읍성보다 컸다는 사실뿐이며 더욱 구체적인 위치를 보여 주는 것은 「동여비고(東輿備攷)」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이다. 「동여비고」는 십신사라는 절 왼편에 무진도독고성을, 「대동여지도」는 읍성 북쪽 냇가 건너편에 고읍(古邑)을 표기하고 있다. 고읍이란 조선시대 읍성 이전의 옛 읍성으로 무진도독고성을 가리킨다.

892년(진성왕 6) 광주에서 거병하여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은 900년(효공왕 4) 완산주[전주]로 도읍을 옮겼다. 같은 시기 강원도를 점령한 궁예는 송악[개성]으로 도읍을 옮긴 후 901년(효공왕 5) 후고구려를 세웠다. 궁예에 투항한 왕건은 상주 등 30여 주현과 웅진[공주]을 평정하였고, 해상을 통해 금성군[나주] 등 10여 군을 공략하여 후백제와 대립하였다.

후삼국시대 나주가 고려의 전신인 후고구려[태봉]의 전초기지였던 것처럼 광주는 고려와 맞선 후백제의 전초기지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견훤은 도읍을 옮긴 뒤 광주성을 아들 신검과 사위 지훤에게 지키게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936년(태조 19) 견훤의 아들 신검이 항복함으로써 후백제가 멸망하였으며, 940년(태조 23)에 무주를 광주로 개편하고 도독부를 두었다. 그 후 995년(성종 14) 행정구역 개편 때 전라도를 해양도라 칭하고 광주에 자사(刺史)를 두었다. 1018년(현종 9) 다시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광주는 강등되어 해양현이 되었다. 1259년(고종 46) 공신 김인준의 외향(外鄕)이라 해서 해양현에서 익주로 승격되고 뒤에 광주목으로 승격되지만, 1310년(충선왕 2)에는 강등되어 화평부(化平府)가 되었다. 화평부로 강등된 이유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당시 광주 토호의 세력을 억압하기 위한 중앙 정부 차원의 견제책으로 추측된다. 1362년(공민왕 11)에는 무진부로 바뀌었다가 1374년(공민왕 23) 다시 광주목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393년(태조 2) 나주목과 함께 광주목에 계수관을 두었는데 광주목에 속한 군현으로는 2도호부[순천, 담양], 2군[보성, 낙안], 7현[고흥, 능성, 화순, 동복, 옥과, 진원, 창평]이었다. 1397년(태조 6)에는 전라도의 군(軍)을 전담하는 병마도절제사영(兵馬都節制使營)을 전라도 광산구 고내상[송정]에 두었다가, 1417년(태종 17)에 도강현[강진 병영]으로 옮겼다. 1430년(세종 12) 광주목사 신보안 구타 사건으로 광주목무진군으로 강등되었다가 필문(畢門) 이선제(李先齊)[1389~1454] 등의 노력으로 1452년(문종 1)에 광주목을 회복하였으나, 1489년(성종 20) 광산현으로 강등되는 등 이후에도 강등과 회복을 반복하였다.

1895년(고종 32) 8도가 23부로 바뀌면서 전라도는 나주부[16군], 전주부[20군], 남원부[15군]로 나뉘게 되고, 이때 광주는 광주군이 되어 나주부에 속하게 되었다. 1896년에는 23부가 다시 13도로 개편되면서 전라도는 전라남북도로 나뉘게 되었다. 이때 광주가 전라남도의 도청 소재지로 정해지면서 이후 전라남도의 중심이 되었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1910년 9월 30일 새로운 지방제도를 마련하여 광주에 읍장을 두었다. 당시 광주는 성 안을 성내면이라 하였고, 성 밖의 기례방, 공수방, 부동방 등 3방과 합하여 광주면이라 하였으며 나머지는 각각 화순, 담양군으로 편입되었다. 1931년 지방제도가 개편되어 광주면은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35년 다시 부정(府政)을 시행하여 광주읍광주부로 승격되고 광주군은 광산군으로 개칭되었다. 당시의 광주읍의 행정구역은 41개 정이었으며, 면적은 19㎢였다.

광복 후 미 군정을 거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시행된 지방자치제에 따라 1949년 광주부광주시로 개칭되었다. 1955년 7월 1일에는 현재 남구에 속하는 효지면 전역을 포함하여 광산군 서방, 석곡, 극락면이 광주에 편입되어 총면적은 155.01㎢가 되었고, 1957년 11월 6일 광산군 석곡면 일부와 지산, 서창, 대촌면 및 담양군 남면의 일부가 또 편입되면서 총면적은 279.25㎢로 확장되었다. 1963년도에는 서창·대촌 출장소가 다시 광산군에 환원되어 광주시 총면적은 214.92㎢로 줄어들고 6개 출장소와 45개 동이 되었다.

1961년 현재의 남구 지역을 관할하는 남부출장소가 설치되어 사구동, 서동, 양1동, 양2동, 월산동, 농성동, 백운동, 봉주동, 효덕동, 송암동을 관할하였고, 1966년에는 계림1구·월산동·효죽동의 3개 동을 분동하여 48개 동으로, 1970년에는 다시 산수2동·서석2동·학3동 등 10개 동이 분동되어 58개 동이 되었으며 당시 광주시 인구는 50만 2000명이었다.

1973년 7월 1일 구제가 시행됨에 따라 종래의 4개 출장소를 폐지하고 석곡, 지산의 2개 출장소만 존치시키는 한편 동구서구로 나누어 구제를 시행함에 따라 남구는 남부, 서부, 지산출장소를 통합하여 서구에 포함되었다. 이후 1980년 4월 1일 북구가 신설되고 이어 석곡, 지산출장소를 폐지할 때도 남구서구에 포함되었으며, 1986년 11월 1일 법률 제3808호로 「광주직할시 설치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어 부산직할시, 대구직할시, 인천직할시에 이어 네 번째로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이후 1988년 1월 1일 법률 제3963호 공포로 송정시와 광산군 전역이 다시 광주직할시에 편입됨으로써 500.73㎢로 크게 늘어났고 4구 83동 9개 출장소를 관할하게 되었다. 1995년 1월 1일 직할시가 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어 ‘광주광역시’가 되었고, 같은 해 3월 1일에 서구로부터 남구가 분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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