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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호남의병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33
한자 壬辰倭亂-湖南義兵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노성태

[정의]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일어난 호남 지역의 의병.

[개설]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관군이 무너지자 호남에서는 김천일을 비롯하여 고경명, 최경회, 박광옥, 김덕령, 고종후 등 의병장이 일어나 금산·이치·진주성 등에서 혈투를 벌였다. 호남 의병은 전라좌수영 수군들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국난을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임진왜란 발발과 전라도 관군]

선조 때 조선 조정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하였다. 한편,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1537~1598]가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고 전국을 통일하였다. 일본 국내를 통일한 도요토미는 내부의 불안을 없애기 위해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침공하고자,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통신사를 통해 일본의 침략 계획에 논쟁이 있었지만, 전쟁 준비를 위한 국방을 소홀히 하였다.

1592년 4월 13일 고니시[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 1만 8,700명이 700여 척의 병선에 나누어 타고 쓰시마섬의 오우라항을 출발하여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부산 첨사 정발(鄭撥)은 적과 싸우다 전사하였고 부산성은 함락되었다. 다음 날 일본군이 동래성을 공격하자 동래부사 송상현은 군민과 더불어 항전했으나 전사하였고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그 후 18일 가토오[加籐淸正]의 후속 부대가 부산에, 구로다[黑田長政]의 제3번대가 김해에 상륙하였다. 4~5월에 걸쳐 제4~9번대에 이르는 후속부대가 상륙하여 수군 병력 9,000여 명을 포함 조선에 침략한 일본군의 총병력은 약 20여만 명에 이르렀다. 부산·동래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3개의 길로 나뉘어 서울을 향해 북상하였다.

일본군의 침입을 접한 조정은 이일(李鎰)을 순변사, 신립(申砬)을 도순변사로 삼아 조령·충주 방면을 방어토록 파견하였지만 막아내지 못하였고 5월 2일 서울이, 6월 14일 평양이 함락당하였다. 일본군이 북상을 계속하고 있을 때 조정에서 희망을 걸고 있었던 부대는 적침이 없었던 호남의 관군이었다. 당시 전라 감사인 이광(李洸)은 일본군의 침입 이후에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다가 국왕으로부터 구원병을 보내라는 명령을 받은 후에야 관군을 이끌고 공주에 이르렀지만, 선조가 피난길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대를 해산하였다. 2차 명령을 받고 4만의 군대를 이끌고 충청 감사 윤선각(尹先覺)이 이끄는 군사 1만 명과 경상 감사 김수(金睟)가 이끄는 약간 명을 합쳐 5만여 명으로 북상 중 용인에서 일본군을 만났지만, 일본군의 공격에 혼비백산하여 궤멸당하였다.

[전라좌수영 수군의 연전 연승]

육상에서 연전연패하여 국운이 위태롭게 되었을 때 바다에서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연전연승하며 해상을 장악,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일본군의 작전 수행에 커다란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당시 일본 수군은 남해와 서해를 돌아 육군에 물자를 조달하면서 수로로 북상하는 작전을 세웠다. 당시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는 박홍(朴泓)[1534~1593],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는 원균(元均)[1540~1597],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는 이순신(李舜臣)[1545~1598],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는 이억기(李億祺)[1561~1597]였다. 그중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1년 전부터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수군을 훈련시키고 무장을 갖추며 식량을 저장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돌격선의 필요를 절감하여 조선 초기에 만들어졌던 귀선(龜船)[거북선]을 개량하였는데, 이는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좌·우수영 수군이 무너지자, 일본 수군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전라도로 진격하였다.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영군은 5월 4일 판옥선 24척을 포함, 47척으로 출동하여 6일간 옥포·합포·적진포 해전에서 총 40여 척의 적선을 격파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5월 29일부터 6월 10일에 걸쳐 이억기가 이끄는 전라우수영 함선 및 원균의 경상우수영 함선과 합세하여 사천·당포·당항포·율포 등에서 적선 70여 척을 침몰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경상도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전 수군을 집결하여 조선 수군을 격파하기 위해 6월 말 부산포에 진을 쳤다.

7월 8일, 이순신의 수군 함대는 이억기·원균의 함대와 합세하여 55척의 전선으로 견내량에 정박 중이던 일본 함대 73척을 공격하였다.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자,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하여 학익진(鶴翼陣)으로 포위·공격하여 47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한산도대첩은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전투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꼽힌다. 이 활약으로 해상으로 북진하여 육군과 합세하려던 일본군의 작전이 좌절되고,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이후 이순신이 이끈 전라좌수영군은 부산포, 웅포 전투 등에서도 큰 승리를 거두면서, 의병 활동과 함께 불리했던 전세(戰勢)를 역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전라좌수영 소속 수군들이 고흥을 비롯 여수, 순천, 보성, 광양인이 중심이었음을 고려한다면, 전라좌수영군의 승리는 곧 전라도 수군의 승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 호남 의병과 고경명 의병의 금산 전투]

관군이 힘없이 무너지고 국토가 일본군에 짓밟히자 각지에서 의병들이 봉기하였다. 당시 일본군의 침략을 받아 유린된 경상·충청도 지역을 비롯하여 침략을 받지 않았던 전라도에서 의병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다. 호남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이는 나주 출신 건재 김천일(金千鎰)[1537~1593]이었다. 김천일은 서울 함락 소식을 접한 후 고경명·최경회 등에게 글을 보내 거의할 것을 촉구하였고, 5월 6일 담양에서 고경명과 만나 거의를 논의하였다. 고경명과 함께 출정이 어렵게 되자, 김천일은 양산숙·양산룡·서정후 등 나주 출신을 주축으로 300여 의병군을 결성한 후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광주 출신의 고경명(高敬命)[1533~1592]은 남원의 양대박과 옥과의 유팽로 등 사림들이 모집한 의병군과 담양에 모여 대장으로 추대된 후 각도에 격문을 발하여 의병으로 궐기할 것을 호소한 후 6월 11일 6,000여 의병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고경명 의병군이 여산(礪山)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은 황간(黃澗)에서 금산(錦山)을 거쳐 전라도 전주(全州)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에 고경명은 “전주는 호남의 근본이므로 금산의 왜군을 격멸하여 전주를 구함이 옳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금산을 향하였다. 이미 금산에 침입한 적을 막기 위해 광주목사 권율(權慄)과 동복 현감 황진(黃進)이 이끄는 관군 500여 명은 금산 서쪽의 이치(梨峙)에서, 김제 군수 정담(鄭湛)과 해남 현감 변응정(邊應井)의 군대는 남쪽 웅치(熊峙)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7월 7일 웅치전투를 시작으로 8일에는 이치에서, 9일과 10일에는 금산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웅치에서 전선이 무너졌지만, 이치에서는 권율과 황진이 이끄는 전라도 관군이 적을 격파하였다. 한편, 고경명의 의병군은 전라방어사 곽영의 군사와 함께 금산성을 공격하기로 하고, 관군은 북문을, 의병군은 서문을 맡았다. 전투가 시작되자, 일본군은 관군을 집중 공격하였다. 관군이 맥없이 무너지자 의병진도 혼란에 빠져 패퇴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고경명을 비롯하여 그의 차남 인후, 부장인 안영과 유팽로를 비롯한 많은 의병들이 순국하였다.

광주·전라도의 의병들이 중심이 된 금산 전투는 패퇴하였지만, 적의 예기를 꺾음으로써 적의 전주 침략을 좌절시켰으며, 전라도 지역 보존의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크다.

[전라좌·우도 의병의 활동과 진주성 전투]

고경명의 금산 전투 이후 1592년 7월에서 10월에 이르는 동안 의병 활동은 절정을 이루었다. 화순에서는 최경회·문홍헌 등이 800여 의병을 일으켜 전라우의병이라 일컫고 북상하여 장수로 진군하여 주변의 왜군을 소탕하였다. 장성에서는 김경수를 맹주로 하여 김제민·기효간 등이 남문에서 창의하여 11월 북상하였다. 이들을 보통 ‘남문의병’이라 부른다. 그리고 보성에서는 임계영이 전라좌의병장이 되어 700여 의병을 모아 장흥, 낙안, 순천, 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진군하였다. 광주 출신 박광옥은 광주에 의병도청을 설치하여 의병과 군량을 모아 김천일·권율 부대에 공급하였다. 또한 남원의 변사정, 태인의 민여운, 해남의 임희진, 영광의 심우신, 광양의 강희열 등이 이끄는 20여 개 부대도 활동하였다.

고경명의 큰아들 고종후도 다시 의병을 모아 복수장(復讐將)이라 칭하고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들 여러 의병부대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활동하다 1593년 6월 일본군이 진주성을 다시 침략해 오자, 한성에서 남하한 김천일 군대와 합류하여 임진왜란 최대 혈전을 펼쳤다.

벽제관 전투와 행주성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전라좌수영 수군에 의해 보급로마저 막히자 4월 한성을 철수한 후 경상도 지역으로 남하하였다. 이들은 김해·동래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와 합세하여 진주성을 재차 공략하였다. 적의 숫자가 너무 많으니 성을 비우고 피하자는 권율 도원수의 공성론(空城論)에 따라 전라병사 선거이가 이끈 관군과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 의병부대마저 성을 포기하고 떠났다. 이때 진주성을 지켜내기 위해 입성한 부대는 최경회[600명], 황진[700명], 장윤[300명], 김천일[500명], 고종후[400명], 이잠[300명], 민여운[200명], 이계련[100명], 강희열, 강희보, 오유, 고득뢰 등의 전라도 의병과 진주목사 서예원, 거제현령 김준민, 김해부사 이종인이 이끈 약간 명 등 3천 500여 명이었다. 이에 비해 일본군은 가토오·고니시 등이 인솔한 9만 3천여 대병력이었다.

1593년 7월 20일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적은 성벽을 뚫기도 하고 벽을 타고 넘어오기도 하였으며, 성문을 깨뜨리기도 하는 등 파상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수성군은 돌을 굴리거나, 불붙인 섶을 적의 머리 위로 던지거나 현자총통(1995)을 쏘는 등 9일에 거쳐 처절한 혈투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27일 성문이 무너지면서 중과부적으로 진주성은 함락되고, 의병을 비롯한 성 주민 대다수가 사망하였다. 조선 측 기록에서는 6만 명, 일본 측 기록에서는 2만 명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라도 의병이 중심이 된 의병군은 전멸당하였지만, 일본군도 심대한 피해를 입어 전라도 지역으로의 진출을 어렵게 만들었다. 따라서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전년도의 전라도 의병과 관군이 중심이 된 금산 전투와 함께 전라도를 보전시켜 국난 극복의 기반을 닦았던 점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전국 의병 총사령관 김덕령]

호남에서 거병한 김천일과 최경회, 고종후의 의병군이 진주에서 순국한 후, 1593년(선조 26) 다시 광주에서 김덕령(金德齡)[1568~1596]을 중심으로 새로운 의병이 결성되었다. 김덕령 의병이 세력을 크게 떨치자, 선조는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이란 군호를 내렸다. 김덕령은 남원에 머물다 진주로 옮긴 후 의병 총사령관이 되어 권율 막하에서 영남 서부 지역의 방어 임무를 맡았다. 그해 10월 거제도의 일본군을 수륙 양면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활약해 적을 크게 무찔렀고, 이어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일본군을 기습, 격퇴하였다. 그러나 김덕령이 활약할 당시에는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 회담이 진행 중이어서 큰 전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후 김덕령은 1596년(선조 29) 충청도 홍산에서 일어난 이몽학의 난과 연루되었다는 고변으로 체포되고, 정탁·김응남 등이 무고를 힘써 변명했으나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65년 만인 1661년(현종 2)이 되어서야 역적에 가담하지 않았음이 확인되어 명예가 회복되었다.

임진왜란은 왜가 침입하여 시작된 전투였지만, 명과 조선이 힘을 합쳐 조선이 승리한 전투였다. 초반 관군의 연전연패로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한 것은 이순신의 전라좌수영군과 전라도 관군 및 의병, 즉 호남인들이었다.

이순신은 1593년(선조 26년) 7월 16일 족친인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라고 썼다.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호남이 매우 중요한 곳이니 지켜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결과적으로 임진왜란 당시 국난 극복의 가장 큰 역할을 수행한 곳은 호남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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