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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224
영어공식명칭 Mun Yongdo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진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53년 9월 16일연표보기 - 문용동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80년 - 문용동 호남신학대학교 4학년 재학
활동 시기/일시 1980년 5월 18~27일 - 문용동 5.18민주화운동 시민군으로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80년 5월 27일연표보기 - 문용동 사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7년 5월 - 국립5.18민주묘지 안장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1년 - 호남신학대학교 명예 졸업장 수여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2년 - 호남신학대학교 순교 추모비 건립
학교|수학지 호남신학대학교 - 광주광역시 남구 제중로 77[양림동 108]지도보기
활동지 상무대 교회 -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능성로 548[사창리 70]
묘소 국립5.18민주묘지 - 광주광역시 북구 민주로 200[운정동 563]지도보기
성격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성별
대표 경력 호남신학대학교 학생|상무대 교회 전도사|시민수습대책위원회 위원

[정의]

전라남도 광주시에 거주하였던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개설]

호남신학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문용동[1953~1980]은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만행을 보고 시민군으로 활동하였다. 문용동은 5월 27일까지 옛 전라남도청에 남아 시민군 무기고를 지키다가 계엄군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문용동은 1980년 당시 호남신학대학교 4학년이었다. 5월 18일 일요일 자신이 3학년 때부터 전도사로 활동하던 전라남도 장성군에 있던 상무대 교회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문용동은 시민들이 계엄군의 몽둥이에 쓰러지고, 노인마저 군홧발에 짓밟히는 것을 보고 시위에 참여하였다.

5월 21일 계엄군이 집단 발포를 하자 광주 시민들이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화순공업소[화순탄광]와 전라남도 광주시 동구 지원동에 있던 석탄공장 탄약고에서 다량의 TNT와 각 지역 경찰서에서 총기류와 실탄, 수류탄 등을 가져왔다. 사고 방지를 위해 시민군은 5월 22일부터 무기를 회수하였고, 5월 23일까지 대부분의 폭약을 회수하여 전라남도청 지하실에 보관하고 있었다.

계엄군이 광주 시내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난 뒤 문용동전라남도청 시민수습대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전라남도청 지하실에 있는 회수된 TNT 폭약과 수류탄 등 무기를 관리하였다. 문용동은 이러한 무기들이 자칫 광주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를 줄 것을 우려해 뇌관 분리를 결심하였다. 하지만 시민군 중에는 폭약 전문가가 없어 문용동상무대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여 군인 한 명이 와서 분리하였다. 이 일을 두고 진상 규명 과정에서 문용동이 일부러 뇌관 분리를 핑계로 군인을 불러와 계엄군이 쉽게 전라남도청을 접수할 수 있었다는 오해를 사기도 하였다.

문용동전라남도청에 계속 남아 있다가 5월 27일 계엄군의 총격으로 사망하였으며, 끝까지 무기고를 지켰다는 사실이 오해를 불식시켰다. 1997년 5월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

[묘소]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묘지번호는 2-33이다.

[상훈과 추모]

「5.18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되었다. 2001년 호남신학대학교에서는 문용동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고, 이듬해 교정에 순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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