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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101
한자 金在珉
영어공식명칭 Kim Jaemi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노기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6년연표보기 - 김재민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9년 3월 21일 - 김재민 김동수 의병장 부대 가담 및 도십장으로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09년 4월 - 김재민 강복암 체포 및 군자금 징발
활동 시기/일시 1909년 5월 9일 - 김재민 장준거 자택 잠입 및 군자금 징발
활동 시기/일시 1909년 5월 23일 - 김재민 면장 백계수와 이장 정현구 사살
활동 시기/일시 1909년 11월 30일 - 김재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 및 모살죄 등으로 교수형 선고
몰년 시기/일시 1910년 5월 11일연표보기 - 김재민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1년연표보기 - 김재민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전라남도 광주군 천곡면 봉산리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김동수 의진 도십장

[정의]

개항기 전라남도 광주 일원에서 활동한 의병.

[개설]

김재민(金在珉)[1886~1910]은 전라남도 광주군 천곡면 봉산리[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태어났다. 개항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김동수(金東洙) 의병장의 부하가 되어 도십장(都什將)으로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제에 협력한 밀정들을 사살하였다. 일제에 체포되어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으로 사망하였다.

[활동 사항]

김재민은 24세가 되던 1909년 3월 21일 일제 침략에 분개하여 김동수 의병장 부대에 들어가 도십장이 되었다. 김동수 지휘 아래 동료 의병 15명과 함께 1909년 6월 상순까지 전라남도 광주, 화순, 담양, 창평, 장성 등의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4월 광주군 오치면 강복암(姜福巖) 집에 잠입하여 강복암을 체포하고, 의병이 잠복하고 있던 봉산(蜂山)으로 끌고 가 군자금으로 엽전 200냥과 수표를 받아 내었다. 1909년 5월 9일 의병 김포수(金砲手)와 광주군 갑마보면 복룡촌 장준거(張俊巨) 집에 잠입하여 엽전 14냥을 징발하였다. 1909년 5월 10일에는 14명의 의병과 함께 임윤팔(林允八)에게 총기 11정과 의복 등을 보관하고 광주군에서 의병 활동을 이어 갔다.

1909년 5월 19일 김재민을 비롯한 김동수 의병장 휘하 20명의 의병은 광주군 갑마보면 면장 백계수(白桂洙) 집에 들어갔다. 이것은 군자금을 충당하기 위하여 일전에 백계수에게 징발한 수표의 돈을 받아 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일본 헌병대가 잠복하고 있다가 포위하여 교전하던 중 의병 3명이 전사하고 총기 9정을 일제에게 탈취당하였다.

김동수 의병장과 부대를 정돈하여 후퇴하면서 패전의 이유를 살펴본 결과, 백계수와 전라남도 광주군 덕산면 이장 정시중(丁時中)[일명 정현구(丁鉉玖)]가 헌병대에 밀고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김재민김동수 의병장과 함께 대책을 숙의하여 면장 백계수와 이장 정현구를 총살하기로 결의하였다.

1909년 5월 23일 밀정 척결 작전을 수행하여 먼저 정현구 집으로 잠입하여 정현구를 체포하여 묶고, 이어서 백계수 집으로 돌입하여 백계수를 체포하는 데 성공하였다. 덕산면 보리밭으로 정현구와 백계수를 끌고 와 처형식을 하였다. 김재민이 먼저 정현구에게 발포하여 넓적다리에 총상을 입히고, 이어서 백계수에게 발포하여 즉시 사살하였다.

이후 김동수 의병장이 체포되고, 김재민을 비롯하여 피신한 의병 12명이 은신 중 완주지방재판소에 자수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자수로 의병 활동을 면죄받지 못한다고 하면서 체포하였다. 김재민은 1909년 11월 30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 및 모살죄 등으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910년 2월 26일 대구공소원에 다시 상고하였으나, 1910년 4월 1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교수형으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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