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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봉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2081
한자 朱奉植
영어공식명칭 Ju Bongsi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노기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4년 10월 16일연표보기 - 주봉식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9년 - 주봉식 광주학생운동에 관련되어 학교 중단
활동 시기/일시 1942년 1월 24일 - 주봉식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2년 8월 징역형을 언도받음
활동 시기/일시 1945년 8월 18일 - 주봉식 광주청년단 부단장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45년 9월 - 주봉식 전라남도체육회 조직 및 초대 회장 추대
활동 시기/일시 1948년 8월 - 주봉식 대한청년단 초대 전라남도 단장 추대
몰년 시기/일시 1949년 8월 12일연표보기 - 주봉식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주봉식 애족장 추서
출생지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금동 43
성격 체육인|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전라남도체육회 초대 회장|대한청년단 초대 전라남도 단장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에서 활동한 체육인 겸 독립유공자.

[개설]

주봉식(朱奉植)[1914~1949]은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금동[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에서 태어났다. 청소년의 체육을 단련시키고, 두 차례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2회에 걸쳐 2년 8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활동 사항]

주봉식은 유년 시절 광주공립보통학교[지금의 광주서석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육상 선수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광주고등보통학교[지금의 광주제일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관련되어 학교를 중단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에 건너가 동경체육전문학교에 들어갔다.

1940년 9월 동경체육전문학교 2학년 때 청소년의 체육을 단련시키며 '조선 독립'을 위하여 단결할 것을 역설하다 체포되어 징역 2년 형을 받았다. 귀국한 뒤에는 서울 조선권투구락부에서 권투를 익혔다. 전라남도 광주에 권투 경기가 들어온 것은 주봉식이 광주로 귀향하여 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광산동 옛 시청 뒤에 있던 흥학관(興學館)에서 권투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충장로5가에 광주YMCA 체육관이 개설되자 체육부를 맡아 권투 사범으로 후진을 양성하였다. 1942년 1월 24일 한국인은 "한국어를 사용하여야 한다."라고 주장하다가 징역 8월을 선고받았으며, 두 차례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2회에 걸쳐 2년 8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광복 후 일본에서 전 일본 미들급 챔피언이 된 문춘성(文春成)은 광주YMCA 체육관에서 수련을 쌓았는데, 1948년 5월 당시 일본 권투계의 우상이었던 일명 '피스톤'이라 부르는 호리구치[堀口]를 상대하여 KO로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광주YMCA 체육관 권투 사범 주봉식의 지도를 받고 이름을 빛낸 인물로 문춘성, 문형식, 김이현, 이달봉 등 체육계의 지도급 인사들이 있다.

주봉식은 1945년 8월 18일 오전 10시 광주극장에서 광주청년단을 창단하였다. 이날 결성대회에서 총단장에 김철이 추대되었고, 주봉식은 부단장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9월 전라남도체육회를 조직하여 만장일치로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다. 이어서 건국준비위원회 산하에 있었던 광주치안대의 대장을 겸임하다가 전남 국군준비대 창설에 참여하였다. 그 뒤, 주봉식은 이범석(李範錫)이 창설한 민족청년단 전라남도 단장으로 계속 청년운동에 헌신하였으며, 한때 『전남신문』을 창간하여 몇 해 동안 경영하였다.

1948년 8월 정부가 수립되고 대한청년단이 창설되었는데, 주봉식은 초대 전라남도 단장에 추대되었다. 1949년 8월 12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정부에서는 국내 항일의 공로로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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