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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981
한자 吳玭
영어공식명칭 Oh Bin
이칭/별칭 성산(聖山),영보(榮甫)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미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47년연표보기 - 오빈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0년 - 오빈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校書館) 권지(權知)에 부임
몰년 시기/일시 1593년연표보기 - 오빈 사망
추모 시기/일시 1593년 - 오빈 장사랑으로 증직|병조 참의에 추증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종사관

[정의]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가계]

오빈(吳玭)[1547~1593]의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영보(榮甫), 호는 성산(聖山)이며, 아버지는 오사운(吳思雲)이다.

[활동 사항]

오빈은 1547년(명종 2)에 태어났으며, 의기(義氣)와 담략(膽略)이 있었다. 전라도 광주에서 살았으며, 1590년(선조 2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校書館) 권지(權知)가 되었다. 이어 성균관 학유(學諭), 홍문관 정자(正字)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금산(錦山) 전투에 참여하였다. 금산에서 패전할 당시 군량미를 모으러 가서 죽음을 면하였고, 고종후(高從厚)를 따라 진주성으로 갔다. 창의사(倡義使)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장사들 중 크게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진주성에서 나가라고 하였는데, 오빈은 김상건(金象乾), 양산숙(梁山璹), 문홍헌(文弘獻), 김인혼(金麟渾), 고경형(高敬兄) 등 5인과 함께 진주성에 남았고, 고종후가 남은 사람들 중에서 오빈을 종사관으로 삼았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1593년(선조 26)에 김인혼, 고경형 등 22명과 함께 복수장(復讐將)을 부축하여 북쪽을 향해 절하고 진주의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상훈과 추모]

오빈 순절 후 1593년 조정에서 합동 위령제를 지내주고 오빈의 벼슬을 장사랑으로 증직하였다. 이후 병조 참의에 추증하고, 정문(旌門)을 세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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